어쩌다 보니가 쌓여서 어쩌다 보니 내가 되었다.
그 시즌이다.
인사평가 시즌이 지났다.
우리는 서비스를 론칭한 지 이제 갓 2년이 지나간 신생회사였기 때문에 매출은 적자였다. 다행히 대표님이 투자를 잘 받아와 주셔서 어찌어찌 다음 피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연봉협상 테이블에는 새로 오신 대표님과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팀을 구축해나가고 계시던 이사님, 나 이렇게 셋이 진행되었다. 기존에 계시던 대표님과 너무도 다른 전형적인 영업타입이셔서 긴장했다. 대표님의 첫마디는 의외였다.
"모든 직원을 통틀어서 본인의 평가가 가장 높아."
2024년에 진행되는 인사평가와 연봉협상은 전년도인 2023년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2023년에 건강 이상으로 인한 한 달 반의 휴직과 회복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비참하게 무너진 멘탈로 인해 성인이 된 이래 가장 힘든 해에 등극했다. 자가평가도 좋은 점수를 주는 게 민망해 일부는 평균보다 더 낮은 점수를 주었다. 실제로도 크고 작은 실수가 반복되는 상황이 많았다. 하지만 내 평가는 개발팀 관리자인 이사님 혼자 한다. 즉, 내 평가가 높다는 것은 앞에 있는 이사님이 높은 평가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
우리 팀은 인사평가 결과를 문서로 전달하지 않고 면담(사내엔 다양한 팀이 있다. 팀바팀이다.)을 통해 구두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항목을 높게 받은 건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대부분 '어떤 부분을 신경 써주세요'라는 피드백이 온다. 올해가 아닌 작년과 재작년의 인사평가는 이런 식으로 전달받았다.
이사님이 날 높게 평가한 부분은 생각보다 의외의 부분이었다.
후임을 챙기고 선임을 돕는 것들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냥 제가 할게요.'라고 나서주는 게 고맙다고 한다.
자잘하게 다른 팀원 백업을 잘하고 있다고 했다.
후임을 챙기고, 선입을 돕는 건, 내가 우리 팀의 허리직급이라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직급상으로는 내 위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아래 직급이고, 선임 다음 입사라 당연하게도 서비스의 모든 히스토리를 알고 있어 다들 나에게 질문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사실상 얻어걸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제가 할게요.'는 사실 다들 바쁘지만 내가 손이 빨라서 다른 사람 시켜서 시간 두배로 들 바에 내가 해야지. 하는 마음이 컸다. 대체로 이런 일들은 사소한 일들이라서 크게 티가 나는 일들도 아니었다.
다른 팀원 백업은 사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고 그냥 내가 알고 있는 부분 안에서 그 사람의 일을 덜어주고자 했던 행동들이었다.
세 가지를 모두 보면 어쩌다 보니, 그냥, 그러다 보니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그것들이 쌓여 내 평가가 되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싫고 잘하는 사람이 되자는 내 생각이, 그 방향이 제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서 사실 너무 만족스러운 피드백이었다. 연봉협상 테이블에서는 대부분 연봉을 깎기 위한 쿠션어('죄송한데~' 같은 표현을 나는 그렇게 표현한다.)가 잔뜩 늘어나기 마련인데 상황이 달라서 너무 놀라웠다. 멘탈이 약한 나를 위한 그저 으레하는 말일지라도 나는 이 평가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결국 그런 것이다. 내가 사소하게 해낸 일들도 그냥 하던 일들도 쌓여서 나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이 회사밖에서 배워온 경험이 아닐지라도 사무실의 비품을 알아서 채워준다거나 누군가의 퇴근을 돕는 잡일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내가 업무외적으로 하던 일들은 결국 그런 것이다. 상사니까 놓칠 수 있는 평사원의 반응들을 공유하고 품의를 대신 올려주고 사무용품을 채우고 다른 팀원들의 빠른 퇴근을 위해 매크로를 만들어주고 그런 것들.
올해도 이제 절반이나 지나가고 있지만 어쩌다 보니가 쌓여서 만들어진 잘하는 나에서 조금만 더 발전시키도록 힘 좀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