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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이 Aug 20. 2022

행운목을 죽였다

- 푸른 등을 찾아서


  거실에 행운목 화분이 놓여 있은 지 20년은 된 것 같다. 엄마가 한창 혈기왕성하게 집안에 화분을 사다 나를 때였다. 동네 꽃집 앞을 지나다 공기정화도 되고 보기도 좋다며, 무엇보다 집안에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말에 덥석 들여놨던 거다. 벤자민, 파키라, 행운목 중 하나라도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유행을 했던 시기였다.



   성당을 다녔고, 평소 미신을 믿는 체질도 아니었던 엄마는 내가 대입시를 볼 때 점집에 갔다. 점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대학을 떨어질 거라고 맞춘 점쟁이는 없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가 재수를 할 때나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점을 봤고 나중에 현실과 맞춰 점괘를 합리화했다.



   행운목은 오랫동안 거실 구석에 뿌리를 내렸다. 통나무 같은 몸통에 크고 시퍼런 이파리가 대칭으로 주렁주렁 매달렸다. 차라리 옥수수나무라고 하면 믿었을 것이다. 어느 구석에서도 행운이란 단어와 매치되는 부분이 없었다. 엄마는 매일 아침 진짜 ‘행운’을 어루만지듯 물을 주고 영양제도 꽂아 주었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관심도 없었다. 



   행운목은 원래 크게 자란다고 하더니 2미터가 넘는 천장에 머리가 닿자 고개가 꺾어지고 휘어진 채로 계속 살았다. 중간에 큰 화분으로 집을 옮겨 주었는데도 미세한 뿌리가 화분 밖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벅차게 성장했다. 그때부터 엄마에게 화분을 정리하자고 말해왔던 것 같다. 거인처럼 큰 나무는 어느덧 좁은 집안을 더 복잡하고 지저분하게 만드는 흉물 같았다.



 “어떻게 행운목을 죽여?”

원래 화분에 저절로 자라는 잡초 하나도 소중하게 여기는 엄마였지만, 특히 집안에 행운을 불러온다는 나무를 없앤다며 펄쩍 뛰었다. 나무 곁을 오갈 때마다 한번씩 “이렇게 열심히 가꾸는데도 집안에 좋은 일이 하나도 없어. 행운을 가져온다더니 다 거짓말이야.” 하고 중얼거렸으면서.      



 “지혜가 담뿍 든 꼬마 과자 하나 먹어 보겠니, 얘들아?”

하고 노인이 말했다. 

“지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할아버지 때맞춰 나타나셨네요! 할아버지 때문에 저희는 푸른 등을 찾아서 사방을 돌아다녔어요!” 발레리가 대답했다.     

(동화 푸른 등, p48)     



  허약한 꼬마 기욤과 사춘기 누나 발레리에게 아빠가 중국인 노인에게서 받은 포춘 쿠키를 선물한다. 쿠키 안에서는 “푸른 등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시오”라는 메시지가 나온다. 남매는 그 메시지를 따라 ‘푸른 등’의 자취를 찾아 모험을 벌인다.      



   엄마는 직접 가위를 들고 행운목의 이파리를 싹둑싹둑 잘라냈다. 이미 나이가 많아서 점점 색깔이 희미해지고 반점이 생기던 차였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엄마의 발목을 잡았던 건 역시 ‘행운목’이라는 상징성이었다. 하지만 집안에 가구를 바꾸면서 커다란 나무가 거추장스럽다는 사실을 엄마가 억지로 받아들였다. 



   이제 나무는 윗동을 모두 잘라내고 반토막이 되었다. 화분은 너무 크고 무거워 아직 옮기지 못했다. 엄마는 우선 줄기와 이파리를 잘라냈으니 죽으면 나머지도 치우자고 한다. 이제 엄마의 일과는 매일 아침 행운목이 죽는지, 살아 있는지 살피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죽겠네. 잎이 다 시들시들해졌네.”

하루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날이면 

“아직 안 죽었네. 잘 안 죽으려나 봐.”

하고 말하는 엄마의 진심을 잘 모르겠다. 


  

 이왕 버리기로 했으니 빨리 죽어 치우기를 바라는 건지, 죽지 않고 끈질기게 버텨주길 바라는 건지. 엄마와 행운목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엄마가 평생 ‘운’이라는 것에 무척 집착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현재 바닥을 친 우리 집의 형편상 운이 더더욱 절실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둘 중 어느 쪽이든 행운목의 생사가 우리 집의 운세와 아무 상관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무가 죽어도 꺼림칙하지 않고 살아도 역시 별 감흥이 없을 것 같다. 사실 나무가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치우자는 내 말은 핑계였다. 행운목 같은 것에 매달리는 엄마가 보기 싫었다는 게 더 정확하다. 행운목이 존재했던 지난 수십 년 간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나무가 불러온 것이 아니었다.      



   기욤과 발레리는 결국 ‘푸른 등’을 만나고야 만다. 하지만 그 푸른 등은 원래 그들이 생각했던 물건이나 장소가 아니었다. 푸른 등이 줄 것이라고 막연히 암시했던 행운도 없었다. 그렇다고 푸른 등이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푸른 등이 아니라 푸른 등을 찾아가는 여정이 남매에게 새로운 깨우침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가만히 운을 기다리기보다는, 운을 찾으러 떠나는 과정에서 오히려 운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그 과정이 오히려 운보다 더 큰 행운이자 진짜 행운의 정체인지 모른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Juan Carlos Martinez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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