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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이 Dec 24. 2024

플라스틱 물의 맛

내 몸에 플라스틱이 흐른다


약을 먹으려고 식탁에 놓인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는데 이상한 맛이 났다. 금방 마개를 땄는데도 물에서 군내가 느껴졌다. 뭔가 오래 묵힌 듯한 역한 맛, 정확히 말하자면 플라스틱 맛이었다. 물도 변하나, 아직 많이 남아 있는 6개 들이 생수팩을 바라봤다.     


생수를 마시는 물로 애용한 지 20년 가까이 된다. 2리터 생수가 여섯 개씩 포장된 생수를 한 번에 두 팩 씩 사서 실내와 현관 밖에 쌓아 두었다. 특히 여름이면 얼음을 얼리거나 냉커피를 탈 때 꼭 필요한 게 생수였다. 평소에는 둥굴레 차를 끓여 마시는 부모님도 여름이면 생수를 냉장고에 꼭 넣어두고 찾았다.


오래전에는 물값이 거저였다. 생수 한 팩 가격이 지금의 절반 수준밖에 안 돼서 부담이 없었다. 게다가 생수 하면 살아 있는 물, 수돗물보다 식용에 적합한 줄 알고 즐겨 마셨다. ‘깊은 산속 옹달샘’을 떠올리며 건강에 좋은 거라고 부모님에게 권하기도 했다. ‘천연 암반수’, ‘무공해’ 같은 광고 문구를 철석같이 믿었고 투명한 페트병처럼 물맛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간혹 식용에 부적합한 생수 브랜드가 적발되었고 페트병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페트병 자체가 환경공해가 된다는 사실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생수를 끊을 수는 없었다. 정수된 물을 그냥 마시는 것보다는 믿을 만한 생수 브랜드를 고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비상시를 위해서도 집에 생수는 꼭 구비해놔야 했다.      


모든 건 ‘미세 플라스틱’ 문제가 불거진 후 달라졌다. 스텐 물병을 구입했고 귀찮아도 둥굴레 차를 더 자주 끓여서 병에 담아 놓고 마셨다. 생수 맛이 변한 건 구입해 놓고도 잘 마시지 않아서였다. 아마도 더운 날씨로 강렬한 햇살을 받아 페트병이 변질된 바람에 물맛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얼마 전 성인 10명 중 9명의 혈액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됐다는 보도는 그간의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었다. 미세 플라스틱을 가장 많이 섭취하는 경로가 바로 생수를 담는 페트병이기 때문이었다. 생수를 마시는 것은 친환경이나 무공해도 아니고 어쩌면 미세 플라스틱을 마시는 일일 지도 몰랐다. 물론 수돗물이나 다른 음료도 마찬가지기는 했다. 아직까지 미세 플라스틱은 정수기로도 걸러질 수 없고, 정수기 자체도 플라스틱 부품이 사용된다. 


플라스틱의 맛은 떨떠름했다. 수십 년 간 생수를 마시며 내 몸에도 플라스틱이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 상상은 단순히 이상한 물맛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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