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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파괴의 미학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대한 감상

by 이쥬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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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 소개 문구는 평소 방송에 비추어진 작가의 모습을 기대감으로 치환시켰다. 기대에 부푼 채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이내 충격에 휩싸였다. 스스로를 죽음의 인도자, 어쩌면 신이라고까지 믿고 있는 오만한 화자와 삶의 의미를 잃은 채 부유하듯 살아가는 인물들. 책 전체에서 공허함과 차가움이 한가득 느껴졌다.



책은 시작부와 결말부에 죽음과 관련된 회화 두 점을 제시한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과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이다. 전자는 죽어가는 ‘마라’의 모습을 차분하고 복잡미묘하게 표현해낸 작품이고, 후자는 아리시아의 왕 사르다나팔이 망해가는 자신의 왕국과 죽어가는 모두를 관조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작중 화자는 각 화가가 죽음을 묘사한 방식과 유사하게 죽음을 바라보며,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작품 내내 일관적으로 드러난다. 화자의 고객인 유디트와 미미는 삶에서 희망을 얻지 못하며, (특히 C로부터) 구원의 가능성을 찾고자 노력해보지만 이는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이들은 미련없이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이 책은 그 여성들을 ‘삶을 저버린 나약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종착점을 선택한 자’로 그리며, 이들의 죽음을 막다른 길이 아닌 하나의, 심지어는 최고의 권리로 상정한다. 작중 화자마저도 죽음을 택할 것이라는 암시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죽음을 택하는 것이 진정 인간이 가진 ‘권리’인가.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인간이 욕망을 갖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로 인해 고통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고의 권리 아닌가? 수많은 이들이 오직 안락사를 위해 스위스를 방문하는 이 시대에 ‘죽을 권리’의 행사를 무조건적으로 비겁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일차원적이고 사려깊지 못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한편 요즘의 저출생 사회를 화자의 렌즈를 통해 이해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책이 상정하는 ‘죽음’의 논리를 ‘탄생’으로 대치하면 된다.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었던, 그리하여 늘 죽음을 떠올리며 사는 이들로 가득한 오늘날이다.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길 바라며 새 생명의 탄생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쏟아져 나오는 저출생 정책에 저도 모르게 냉소를 뱉는 나 역시, 이 세대의 한가운데에 있다.



죽음에 대한 찬미로 가득차 보임에도 이 책에는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진다. 화자의 말처럼, 뒤돌아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마치 오르페우스를 타석으로 삼듯 말이다). 무료함 속에서 타인의 구원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나를 나의 지옥에서 꺼낼 방안을 찾아야 한다. 향기 없는 조화 더미에도 향을 입히는 건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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