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은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전학은 많은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은 아닙니다. 아마 많은 부모님들께서 학기 중간이나 방학 때 전학을 하면, 자녀의 학교 적응에 부담이 있으리라고 걱정하실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2번의 전학을 했습니다. 동생의 경우에는 중학교까지 3번의 전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초등학생 시절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일이 막중한 임무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잦은 전학에 부모님께서는 미안하게 생각하셨지만, 동시에 학교에 잘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전학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고, 여러분과 같이 생각해볼 주제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2. 전학의 기억
저는 초등학생 때 총 두 번의 전학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 지나고 한 번, 그리고 5학년이 지나고 한 번입니다. 각각의 전학은 다소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가족은 소위 말하는 도시에서 시골로, 그리고 시골에서 다시 도시로 이사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전학의 경우 부모님들은 기존의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저와 동생은 각각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이었습니다. 겨울 방학을 신나게 보내고 큰 집으로 이사도 온 상태였습니다. 작년에 만났던 친구들과는 이미 얼굴을 못 본지 오래였습니다. 어른들의 걱정과 달리 저희 형제는 큰 걱정 없이 새 학기에 입학했었습니다. 당시 어리기도 해서 '전학'을 염려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전학을 간 학교는 인근에 큰 댐이 있는 금강의 작은 학교였습니다. 새학기 첫날 다들 서먹한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어떤 자신감이 있었는지, 3일만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그 주에 있는 반장 선거에서 회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회장이 된 것을 듣고 외할머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잘했다고 칭찬을 하신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왜 칭찬을 받아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제가 어른이 되어서야 당시 제가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는 점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더욱이 내성적이고 과묵하기도 해며, 사람을 새로 사귀는데 많은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려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의 저를 보면, 늘 친구들 사이에 몰려서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학교에서 천주교를 믿는 학생은 저와 저의 동생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변두리의 아이들에게 있어서 저는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이들은 종종 저에게 와서 이전 학교의 생활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대전에서 엑스포를 했었는데, 새로운 학교의 아이들이 대전 엑스포를 갈 기회가 없었음을 알고 놀랐던 때가 기억납니다. 저는 대전 엑스포의 3D 영화관과 움직이는 로봇, 한빛탑, 꿈돌이와 꿈돌이 랜드 등 신이 나서 설명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런 저의 말을 신기하게 듣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아이들이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시기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실을 말해도 그 말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습니다. 일부 아이들은 저의 말을 믿지 않았고, 저의 말을 두고 자기들끼리 진실 공방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인근에 천주교 성당은 없었고, 온통 개신교 교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저에게 천주교라는 종교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었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성당에 다니고 있어도, 천주교라는 종교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목사인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종교'라고 해서 저도 '그렇다'고 얼버무린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아들인 그 아이는 '천주교는 최근에 갈라진 종교'라고 설명을 했었습니다. 아마 그 아이는 '구교'(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설명으로 아이들에게 '천주교'는 더욱 세련되고 신비스러운 종교로 비춰졌었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미사 중에 신부님의 옆에서 봉사를 하는 '복사단'을 했었습니다. 복사단을 하면 하얀 옷과 적, 녹, 백, 자색의 망토를 입게 됩니다. 장래희망을 설명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저는 제가 성당에서 활동하는 사진을 가져왔었습니다. 아이들은 사진 속 하얀 단복을 입고있는 저를 보고 천주교라는 종교에 환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학교의 아이들은 주로 학교가 끝나고 산과 들로 놀러 나갔습니다. 당시 과학책에 '플라나리아'가 있었는데, 이를 실제로 잡겠다고 가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모험심에 친구들을 따라 나섰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수풀과 웅덩이에 들어가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또 옷이 더러워지는 일에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운동장에 배수가 좋지 않아 교문 앞 도로까지 물바다가 되었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비를 맞으며 신나게 축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옷을 사러 갈 때 어머니와 이리보고 저리보고 한참을 고르기 때문에,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옷이 더러워지면 다시 빨면 된다고 크게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저는 남자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주로 검도와 택권도를 했으나, 저는 피아노 선생님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쳤었습니다. 당시 남자 아이들과 저는 같은 공감대를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저에게 '여자애'같다고 놀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남자 아이들의 모습에 거리를 두려고 했고, 그래서인지 주로 여자 아이들하고 같이 어울렸습니다. 어렸던 저의 인상에는 제가 가진 '다름'이 때때로 배척의 이유가 되기도 했으나, 반대로 호감의 요소가 되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 저는 학교에 적응을 하였고, 5학년이 되면서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반에서는 제가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었고, 저를 짝사랑하는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의 중학교 진학을 걱정하신 부모님은 다시 도시로 이사를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5학년을 마치고 다시 도시로 전학을 갔습니다. 이상하게 두 번째 전학때에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야 해'하는 부모님의 말씀에 걱정이 앞섯습니다. 저는 당시 초조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러한 이유는 어머니께서 시골에서 와서 무시받지 않게 새로운 옷을 사주셨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달라진 어머니의 행동에 스스로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제가 전학을 오자마자 학급 회장으로 당선된 것을 기억하신 외할머니께서는 새로운 학교에서도 잘 할 것이라고 응원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걱정과 외할머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긴장된 상태로 새 학기 첫 날을 맞이했습니다. 아이들은 첫날에도 씨끌 씨끌 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니, 이미 아이들은 전교생들을 다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제가 전학생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고 저는 많은 부분에서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아이들 대부분이 '전과'를 가지고 있었고, 전과를 배껴서 숙제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미 선행학습으로 그 학기에 배울 교제를 '방학생활 평가물'로 가져온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방과후 개인활동'으로 '영화관람'과 '미술 전시 관람' 같은 활동을 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클리어 화일에 각종 팜플렛과 영화 포스터를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로 큰 식당으로 같이 이동을 했습니다. 이전 학교에서는 교실에 식사카트가 들어와서 먹었기에, 전 학년이 구역별로 큰 식당을 나누어 사용하는 광경은 저에게 매우 이질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자 다들 학원을 가겠다고 봉고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저에게 남은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계속 이렇게 혼자이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홀로 돌아왔었습니다.
이후 저는 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저의 생활을 걱정한 부모님은 새로원 취미 생활로 '라켓볼'을 추천하셨습니다. 그때 가장 인기있었던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라켓볼을 하는 장면이 잠깐 등장합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라켓볼이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향후 10년 뒤에는 볼링을 능가하는 실내 스포츠가 될 거라 홍보했었습니다. 그리고 마르고 곱상한 저의 이미지 때문에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염려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피아노를 그만두고 라켓볼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 사이에서 학급에서 제가 운동을 한다는 소식이 돌았습니다. 이후 학교에서 싸움을 하는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싸움을 잘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키가 남들보다 크고, 운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싸움을 잘하는 아이들은 저를 곧잘 자신들의 무리에 끼워 주었습니다. 학생들간에 싸움을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단지 싸움을 잘하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일반 아이들을 무시하는 생활에 젖어 들었을 뿐입니다. 저는 싸움을 잘하지도 관심이 있지도 않았으나, 그런 저의 모습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노는 무리에 섞이는 상황은 저에게 우쭐함과 희열을 안겨 주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의 저를 떠올리며, 철이 많이 없었고 겉멋이 잔뜩 들었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제 동생의 경우에는 학급에 잘 적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담임 선생님한테도 미움을 받았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알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운동장 한편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맞고 있는 동생을 목격했고, 동생에게 달려가 다른 아이들을 두들겨 패주었습니다. 약자에 대한 보호나 정의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집에서는 늘 싸우는 동생이어도, 남이 저의 동생을 건드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저의 기억에 이런 일은 체육 수업시간에 한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갑자기 동생이 저의 교실에 와서 '형 우리 담임 선생님이 형을 찾아'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떨고 있는 동생을 진정시켰고 동생의 반으로 갔습니다. 동생의 담임 선생님은 저에게 '너 깡패야!'라고 했고, 저는 지지 않고 동생을 때린 아이들을 지목하면서 '재네가 깡패입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당시 아동의 인권은 지금보다 좋지 못했습니다. 동생의 담임은 제가 잘못을 했으니 저와 제 동생을 때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동생을 찾아갔으니 제가 동생 것까지 모두 맞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저는 저의 교실로 돌아가 저의 담임 선생님께 있었던 일을 알렸습니다. 그때 교실은 숨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저는 당황한 아이들을 무시하며 저의 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몸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주체할 수 없는 불안으로 몸이 떨리었습니다. 방과후 시간에 저의 담임 선생님은 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집에 돌아가니 동생이 담임선생님께 사과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일은 한동한 온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소문은 돌고 돌아 저는 어느덧 여자 선생을 울린 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조용히 지내려고 노력했고, 과해진 소문과 관심에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종합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의 저는 불안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 몰두할 것이 필요했고, 스스로 남들처럼 이 생활에 평범해지고 싶었습니다. 저는 싸움을 하는 무리에 속하는 것이 저에게 불안을 야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의 경우에는 따돌림과 구타, 무시와 외로움 등을 불러왔습니다. 강자의 무리에 낀 저는 수월한 생활을 했지만, 약자로 판단된 동생은 괴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일반 학생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평범한 아이가 됨으로써 불안의 상황이 지나가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전학은 저와 동생에게 한계 상황을 안겨주었습니다. 저희는 이쪽의 무리에서도 저쪽의 무리에서도 소속되기 어려웠습니다. 소속감을 가지지 못한 저희는 타인을 잘 믿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친 행동과 언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시골 학교로 전학을 갔었을 때, 저희는 종종 이전 학교 근처에 있었던 분식점과 문구점을 추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시골 학교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그들과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도시로 다시 전학을 왔을 때에는 거꾸로 정이 있는 시골 학교의 생활을 그리워했습니다. 두 번의 전학에서 저는 이전의 생활에 그리움을 느끼며 이질적인 현재에 소속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저의 부적응은 폭력적인 행동으로 드러났고, 동생의 경우에는 따돌림으로 드러났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전학'은 주체를 이쪽에도 저쪽에도 관계하지 못하는 사건이었으며, '기존'과 '새로움'의 경계를 넘는 계기이자 시련이었습니다. 저는 '전학'에 대한 경험을 떠올리며, 당시의 심리 상태에 이질적인 낯선 세계를 마주하고 느끼는 불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느낌은 주변에 가득한 '새로움'이 마치 공격적인 위험 요소처럼 여겨졌습니다. '새로움'은 긍정적인 대상이 아니었고, 마치 제가 노력하여 다가가고 학습하여 친숙한 대상으로 바꾸어야 하는 과제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3. 전학과 불안
성인이 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불안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불안에 대해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시험과 같이 긴박한 외부 사건의 다가옴에 의해 발생하는 불안이 있었고, 또는 초자아의 이상과 이드의 욕망을 각자 조절하면서 자아가 느끼는 불안, 자유의 무한한 가능성에서 느끼는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불안, 죽음을 마주하고 느끼는 불안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개의 불안은 전학으로 인해 발생한 저의 불안과 다소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불안은 전학 이전에 느낀 감정이 아니라 전학 이후에 느낀 감정이고, 저의 불안은 이상과 욕망이라는 상이한 지향의 대립과 연관성이 적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의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나 죽음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의 관심은 환경에 대한 적응이었으며, 아직은 어린 나이에 죄의 가능성이나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책을 뒤지며 불안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설명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불안은 공포와 차이를 지니는데, 공포는 두려움의 대상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불안은 그 태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고 합니다. 공포는 공포를 유발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을 회피하거나 제거하면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안의 경우에는 불안의 대상이 없어서 제거할 수 있는 기분이 아닙니다. 불안은 위협의 대상이 불특정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에 따르면 불안은 세계 구조와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의 특성에서 발생합니다. 인간 존재는 홀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주변의 세계와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를 두고 '세계-내-존재'라고 부릅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이 주변 세계를 인지하게 되면서,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으나 무의미함으로 가득 찬 세계의 안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즉 이질적이고 낯선 세계에 자신이 '던져져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에 불안이 시작됩니다.
4. 나가며
하이데거의 설명은 전학을 통해 경험한 저의 불안과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낯선 환경에 던져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저의 불안은 이질적인 사회 속에서 처해있는 존재의 상황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은 우리가 폐쇄적이지 않고 세상에 개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인간 존재가 고립적이라면, 주변 세계를 고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동생은 '새로운 학교에 적응해야 한다는 임무'가 있기에 스스로 염려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설명을 듣자 저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저는 느낀 불안이 제가 나빠서가 아니라, 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내던져진 세계에 자신을 보호하고 투쟁하기 위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과거 저의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에게 말 한마디를 전하고 싶습니다. 고생했다고 말입니다.
해당 회차에서 언급한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와 시간> 238쪽에서 254쪽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