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사회에 영향을 주는 인물들이 한정적이었습니다. 어린이의 시각에서는 TV에 나오면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주로 어른들이 보는 뉴스의 사람들이나, 탈런트, 가수 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는 보다 다양한 이들이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소위 인플루언서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정확하게 인플루언서를 한정할 수는 없으나, 개인 방송 플랫폼이나 SNS를 운영하면서 많은 수의 구독자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인터넷과 SNS 유튜브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개인 방송인과 지방파 방송인에 대한 구별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OTT 시장의 성장과 오리지널 컨텐츠, 신규 방송 체널과 스트리밍 프로그램의 출시로 점점 개인 방송인의 영향력이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성장세에 따라 방송인들의 과거의 잘못된 행위나 최근의 행로로 논란이 다수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활동 중단 또는 체널 폐쇄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개인 방송 플랫폼에는 6개월 동안 새로운 게시물이 업로드되지 않을 경우 수익 창출 자격이 박탈됩니다. 그래서 개인 방송인의 논란에는 늘 그들이 6개월 전에 복귀할 것이라는 조롱하는 댓글이 달리기도 합니다. 반대로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의 행동을 옹호하고 복귀를 바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현상을 가만히 보면, 잘못을 비난하는 사람과 잘못을 덮어주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잘못'을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얼마나 힘들었으면'하고 동정의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성이 나쁘다고 호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해당 사진은 참조를 위해 AI 이미지 생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논란을 일으킨 방송인들을 보면서 '잘못'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조명과 유명한 게스트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던 이들, 하지만 이제는 단정한 머리에 양복을 입고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과거의 실수로 자신이 가꾸어 온 성취가 무너지게 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첫 번째 잘못'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2. 첫 번째 잘못의 기억
저와 동생은 이미 철이 들었을 때부터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천주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성당을 다녔죠. 신에 대한 호칭도 하느님과 하나님, 하늘님, 하는님 중에 무엇이 맞는지 맞춤법도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저희 형제에게 있어 종교는 예전부터 늘 있었고, 저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부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저와 동생은 어려서 두 번의 전학을 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저희는 스스로 '성당다녀요'하고 저희를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반에 천주교 세례를 받은 친구는 많지 않았습니다. 같은 학년에 네 다섯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 사이에서도 '저 = 천주교 신자'라는 공식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개를 할 때, 딱히 할 말이 없으면 성당을 다닌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성당에 대해 이것 저것을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에게 성당에 대해 물어본다 해도 제가 아는 것은 저의 세례명이 '레오'라는 것과 동생은 '토마스'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레오가 무엇이고 토마스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천주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었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더욱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성당을 다닌다는 점에 애착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무늬만 신자인 상태로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님으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천주교 신자이니, 앞으로 성당에 가서 교리를 받고 '첫영성체'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천주교에서는 너무 어린 나이에 세례를 받을 경우,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성체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아이가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교리를 교육하고 미사 중에 성체를 받을 수 있게 해줍니다. 첫 번째 성체를 영한다고 해서, 이를 '첫영성체'라고 부릅니다. 이를 기점으로 아이들은 신자다운 신자로 인정받아 미사 중에 성체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첫영성체 교리는 저에게 있어 꽤나 번거로운 행사였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미사 중에 성체를 받지 않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첫영성체 교리가 미사 전에 이루어지고, 매번 숙제가 있기 때문에 그리 호감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저희 형제는 미사 전에 근처 빵집을 들러서 빵을 먹거나,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군것질을 하였습니다. 아니면 근처 PC방에서 게임을 하고는 했죠. 그래서 미사 전에 있는 다른 프로그램을 원치 않았습니다. 또한 출석률이 낮거나 기도문을 암기하지 못하면 제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떨어지면 1년을 기다렸다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한 살 어린 동생들과 말이죠. 그래서 저는 첫영성체 교리를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요구는 완강했습니다. 부모님은 천주교 신자면 꼭 해야 한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당을 다니는 아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자신이 후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모든 행동에는 댓가가 있는데, 그 대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는 점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죠. 이런 저의 모습을 어머니는 귀엽게 보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점차 동생을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영성체는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는데, 부모님은 저와 같이 동생도 받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집에서 성당까지 거리가 멀었는데, 첫째가 하는 김에 둘째도 같이 하려는 계획이셨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동생은 첫영성체 교리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 친구들은 받지 않는데, 형하고 같이 하면 1년 빨리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울며 겨자먹기로 첫영성체 교리를 듣기로 하였습니다. 안하면 저랑 동생이 같이 안해야지, 저는 안하는데 동생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첫영성체 교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교리 공부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첫 번째 교리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아담과 이브라고 부르는데(하와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하와로 발음되는데, 이를 영어로 읽었을 때 이브가 됩니다.), 이는 최초의 인간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대략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의 인간은 선과 악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의 곁에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이때 신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해도 되지만, 단 선과 악을 알게하는 열매는 먹어서는 않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뱀이 하와에게 다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하와는 이 말을 듣고 열매를 먹고, 자신의 짝인 아담에게 권하여 아담도 먹게 됩니다. 이후 둘은 선과 악을 알게 되어서 수풀에 몸을 숨깁니다. 아담을 찾는 신에게 아담은 하와를 탓하고, 하와는 뱀을 탓합니다. 이를 본 신은 크게 노하며 인간에게 죄를 내립니다. 이후 아담과 하와의 잘못은 '원죄'가 되어 모든 세대를 거쳐 인간의 후손들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이야기에 나오는 '뱀'이 악을 상징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의문은 다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학교에서 천주교 신자는 저 혼자 뿐이었는데, 그러면 신자가 아닌 아이들은 본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조상의 죄를 떠안고 있는 것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 학교에는 저 보다도 착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태초의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모르는 상태여서, 뱀의 꼬드김에 실수를 하게 되었으니 이는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애초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르는 상태인데, 무슨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 행위의 책임을 뭍는 것은 가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의문에 따라 신부님께 질문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셨고, 다른 아이들 또한 저를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동생과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와 달리 동생은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생각을 이해받고자 동생을 설득하려고 했으나, 동생은 옛날 이야기니까 그냥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동생은 이를 두고 신화같은 이야기이니 교훈삼아 생각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곰곰히 생각해보니 단군 신화를 듣고 실제로 한국인이 왜 곰의 후손이냐고 질문이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혼자 너무 심각하게 질문해서 신부님을 곤란하게 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후 '첫 번째 잘못'에 대한 생각은 저의 기억 저편으로 잊혀졌습니다. 큰 고민거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에 대해 깨닫게 된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입니다. 담임 선생님이 남자셨는데, 무섭고 엄한 성격으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때까지는 모범생 이미지로 나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제가 실수로 교제를 가져오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불려 나갔습니다.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너 학교 공부는 하냐?'는 질문에 '네.' 라고 제가 답했고, 그래서 '한거 말해봐'라고 해서 근처 자리의 아이가 펼친 책을 대충보고 말을 지어냈습니다. 혼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에서 한 아이가 '다음 장에 있는 내용이네' 라고 나즈막히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고, 저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부모님이 학원에서 다 배우니 괜찮다고 했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저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고, 쉬는 시간에 '다음 장에 있는 내용'이라고 말한 아이를 찾아가 화를 냈습니다. 그렇게 저는 문제가 잘 해결되서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일은 더 커져서 엄마는 선생님과 면담을 해야 했고, 반 전체에 이 소식이 퍼져서 저의 평판이 나빠졌습니다. 저는 주목을 받을 때마다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불안에는 '또 다시 혼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 한번의 실수가 모든 것을 망치는 구나' 이후 저는 나빠진 평판을 회복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회복이 불가능한 관계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저의 뒤에서 나즈막히 말했던 그 아이, 그리고 제가 쉬는 시간에 가서 화를 낸 아이하고는 끝내 화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성경에 '아담'에서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 탓을 했고, 그 다음에는 선생님 탓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반에서 저의 존재가 사라지길 바랬습니다. 저의 잘못에 숨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일로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제가 자발적으로 저의 잘못을 인지하고 고해를 한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죄의 전과 죄의 후, 우리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3. 첫번째 잘못에 대한 철학적 고찰
성경에서 아담이 지은 첫 번째 잘못을 '원죄'라고 부릅니다. 이 원죄에 대해 철학적으로 분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입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아담은 최초의 인류로 만인의 선조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초에 우리의 대표는 아직 현재의 인간과 완벽히 동일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직 윤리, 법, 도덕 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홀로 살았기 때문에 사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고, 타자의 무리가 없기 때문에 법 또한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기 전 아담은 현재 인류와 다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오히려 현대의 성인에 가깝다기 보다는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습니다.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임춘갑 옮김, 68쪽.
만약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키르키고르는 아담의 죄가 없었다면, 그는 순결한 자로 남았을 것이므로 인류에게 '윤리학'이라는 학문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기에 윤리적인 문제에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이를 근거로 지식의 체계를 구성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순결한 상태가 좋다고 인지하고 있지만, 사실 순결한 상태는 단지 존재할 뿐인 상태로 이는 실존의 자세라고 볼 수 없습니다. 순결한 상태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경험허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상 실존적 고민과 결단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순결은 무지의 상태입니다. 즉 순결은 추구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누군가 거쳐가는 일시적인 상태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보다 인간적인 나약함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을 실존적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순결이 지향 되어야 할 상태가 아니라, 초월을 필요로 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순결의 상태는 어떻게 초월할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순결의 상태는 자유를 생각할 필요없이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라고 합니다. 선과 악의 분별이 없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 가능하고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날 아담에게 금령이 발생합니다. "저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않된다."(창세기 3장 1절) 키르케고르는 '하지 마라'라는 금령에서 불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때에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금지의 대상이 주어지면 상황이 바뀝니다. 금령을 기준으로 '따름'과 '어김'의 선택이 발생합니다. 불안의 반대는 안정일 것입니다. 선택의 기로가 없으면 우리는 안정적일 것입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금령이 주어지고 나면, 금령을 어길 수 있는 죄의 가능성이 인지되고 이는 곧 불안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금령'에는 심판이 말이 뒤따릅니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창세기 3장 3절) 이에 수 많은 의문과 고민이 떠오를 것이고 이는 다시 불안의 정서를 유발할 것 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이는 죄가 드러날까 불안해하며, 죄가 드러나고 나서는 형벌로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다시 '반복적으로 죄를 지을 가능성'을 인지하고 처음의 불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불안이 죄와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첫 번째 잘못'은 첫 번째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기준으로 불안을 반복하는 '죄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임춘갑 옮김, 224쪽.
누군가는 이러한 설명을 듣고 죄가 반복되는 비관적인 처지를 운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과정이 바로 '질적인 비약'이라고 말합니다. 순결의 상태에서 윤리적 딜레마를 마주하는 상태로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기 전 이전의 순결한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 아니라, 죄의 반복 속에서 실존하는 방향을 추구해야 합니다. 죄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에서 죄를 찾고 죄책을 느끼며 새로운 불안을 감지한다면, 이는 죄를 통한 새로운 비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담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설명이 우리 모두가 어렸을 적 성장기에 경험할 법한 '죄'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의 모든 실수가 죄로 인식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처럼 특수한 기억은 마치 영원한 과거가 되어 '아담의 첫 번째 죄'와 같은 기억이 됩니다. 그리고 이는 성인이 되서도 극복하기 어려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잘못을 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잘못으로 인해서 올바름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4. 나가며
미래가 없는 죄인 없고, 과거가 없는 성인이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성인이라는 존재도 순결한 상태를 완벽하게 유지해서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라, 죄라는 실패를 반복하면서 도달하게 되는 초월의 경지인 것 같습니다. 죄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현재는 죄인일지 모르나 미래에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은 무악의 순결이 아니라, 실수에서 자신을 바로잡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방송인들이 각자의 잘못으로 인해, 사과 영상을 업로드하고 자숙의 시기를 보냅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은 완벽히 통제할 수 없고, 나의 욕망과 약점 또한 나의 행동을 억압합니다. 선의로 한 행동에서 나쁜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의도하지 않은 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잘못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나름의 사정으로 자숙의 시간을 보내는 분들을 응원합니다.
해당 회차의 글은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 임춘갑 옮김, 치우, 2011, 53-225쪽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