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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희 시인 Aug 31. 2023

사랑의 묘약

《월간에세이》 2023년 9월, 통권 437호 中

사랑의 묘약

 2023년 4월 20일 오후... 초고 씀.                 

                                           - 이은희



제비꽃과에 속하는 삼색제비꽃이라고도 하는 팬지꽃의 꽃말은 "나를 생각해 주세요"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서 요정들의 왕 오베론은 팬지꽃 즙으로 사랑의 묘약을 만든다.

묘약은 잠든 사이 누군가가 눈에 발라놓으면 발린 사람이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신비스러운 마법이 걸린 이다.





아주 오래전에 한 사람을 만났다.

하얀 피부에 속쌍꺼풀이 있는 동그란 눈, 윤기가 흐르던 입술,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버려서 코가 기억에는 없다. 하지만 코도 잘 생겼을 것이다.

모든 것이 순수하기만 했던 철이 없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이해를 받을 수 있었던 건지 모를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시험기간이 되면 그는 그의 학교 도서관에 내 자리도 함께 잡아주었다. 예비역이던 그는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평소에도 늘 이른 새벽부터 학교 도서관에 상주하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그는 늘 자기와 다른 열람실에 내 자리를 잡아줬다. 그땐 그 사실이 좀 기분 나쁘기도 했었지만 점심 때는 그래도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와 구내식당이나 학교 밖 가까운 곳에서 밥을 사주었다. 용돈이 넉넉지 않던 나는 자판기 커피 정도만 샀을 것이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지나가는 말로 좋다고 했던 노래를 공테이프 두 개에 녹음해서 내 단짝 친구 것까지 전해준 적도 있었다.




내가 '오빠가 너무 좋다고, 사귀자고' 졸라댔던 말에는 늘 '아직 어린애가 무슨 소리를 하냐며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던 사람이 한 번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 없던 사람이 어느 이른 겨울날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는데 네가 커피 한 잔만 사주면 시험을 잘 볼 것 같다"라고 하며 그가 자취했던 근처에 '별다방'에서 오후 늦게 보자고 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우리는 늦은 오후에 거기서 만났다.


그의 자취집과 가까운 이모집에서 김장 담그는 것을 도와주고 김치를 보자기에 담아 들고 만났던 나의 모습에서 어쩌면 젓갈이 잔뜩 들어간 김치냄새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여자 동기가 시험 응원선물로 준 초콜릿에 위스키가 살짝 섞여있어서 조금 취했다고 말했다.  홍조를 띠던 그의 모습이 술 때문인지 아님 나 때문인지조차 분간할 줄 몰랐던 그날의 나는 그의 신경을 잔뜩 건드리는 말을 해버리고 자기를 다시 안 봐도 좋겠냐는 말에 다시는 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토해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그가 한 번도 나를 여자로 봐주지 않고 그냥 귀여운 동생처럼만 생각한다는 것에 욱해서 그렇게 행동을 했던 것 같다.


그를 별다방에 남겨두고 김치 보자기를 들고 나오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렀지만 나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철없던 스물두 살 12월, 겨울 초입에 하얀 눈과 함께  그에게 남겨진 나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이후 꼭 3년가량이 흘렀던 겨울 토요일 밤 교회 청년회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나오는데

"은희야, 잘 지냈어? 지나가다 정말 우연히 널 봤네.

너무 반갑다. 차 한 잔 할 수 있어?"

너무도 반가운 그의 모습에 당연히 좋다고 대답을 했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잠시간의 만남을 갖게 됐다. 

나는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아직 싱글이라고 했다. 당연히 가끔 밥이나 먹고 차나 마시자고 했으니 나의 마당발 인맥을 보면 남. 녀 사이가 아닌 그냥 교회 오빠처럼 만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삼주에 한번 정도 그러니까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어떤 스킨십도 없었고 그저 편한 교회 오빠를 대하는 식으로 만났었고  역시 나를 귀여워하는 동생 이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철저히 믿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헤어질 때면 꼭 한 가지씩 작은 선물을 사주곤 했다.

늘 나에게 골라보라고 했고, 내가 고른 것을 사주었다. 그런데 항상 그는 물건을 두 개씩 샀다.

그리고는 하나는 나를 줬고, 나머지 하나는 본인이 챙겼다.

어떤 날은 조금 궁금해져서 "오빠, 근데 왜 꼭 오빠는 물건을 두 개씩 사는 거야?"라고 했을 때 그의 대답은 자기에게 아직 결혼 안 한 한 살 차이 여동생이 있는데 여동생에게도 선물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참 순진한 건지 맹한 건지 스물여섯을 먹었음에도 나는 아이였나 보다.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다 믿었으니까. 아니 딱히 의심을 해야 할 사이가 아니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다시 만난 지 4개월가량의 시간이 흐르고 이듬해 4월 중순 무렵, 는 오늘은 좀 멀리 시외로 드라이브를 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괜찮다고 말했다.

많이 멀지는 않지만 3~40분 운전을 해서 가야 하는 곳으로 우리는 드라이브를 갔다.

그날 시외의 어느 식당에서 돌솥비빔밥을 먹었던 것 같다.

밥을 거의 먹었을 무렵 갑자기 다른 때와는 조금 다른 무거운 말투로 그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은희야, 사실은 예전에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도 너를 많이 좋아했었다.

나 다음 달 5월에 결혼한다.

내가 선물을 늘 두 개 샀던 이유는 결혼할 여자를 주기 위해서였어.

부모님 권유로 선을 봐서 결혼하게 된 그녀를 아직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 날짜를 잡고 나서 내 마음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작년 12월 너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교회 앞에서 기다렸던 거란다.

내가 너에게 그때 나도 너를 많이 좋아했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면 평생 네가 나의 마음에 앙금처럼 남을 것만 같아서 이렇게 계획 아닌 계획을 세우고 너를 만나왔다.

이제 오늘 이후 나는 네 연락처를 지울 것이고, 내 핸드폰 번호도 바꿀 거야.

그러니 잘 지내고, 꼭 시누이 없는 집으로 시집가서 잘 살기를 바란다.

은희는 씩씩하고 밝아서 잘 살 거야. 꼭 그럴 거라고 오빠는 믿는다."




사실 이날  지난 고백을 듣고 나의 마음이 어땠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단지 중요했던 것은 스물한 살 여름 수련회에서 첫눈에 반하여 스물두 살 겨울까지 가슴앓이 하며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쫓아다니게 했던 그도 똑같이 나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위안쯤이었을까?

그리하여 내 스물 초입사랑이 결코 짝사랑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는 기쁨이었다고나 할까?


지금도 29년 전 처음 본 그 종종 생각나곤 한다.

분명 그는 멋지게 늙어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 그를 본다면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참 많은 인연을 만났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고, 친분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29년 전 오베론의 사랑의 묘약을 누가 내게 그리고 에게 발랐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죽는 날까지 그를 기억할 것 같다.

나의 뇌리에 각인된 여름 수련회에서의 해사했던 스물여섯 살 그의 모습을 그렇게...

그리고 스물 초입의 내 사랑이 외롭지 않도록 늦게라도 고백해 준 에게 지금도 아주 가끔 나는 고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수필은 분량을 줄여서 《월간에세이》 2023년 9월, 통권 437호에 실었습니다.




추신.

예쁘게 삽화까지 해서 실어주신 《월간에세이》 편집진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또한 날로 승승장구하는 문예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추신 2.

https://brunch.co.kr/brunchbook/shuvy1004


신 3.

https://brunch.co.kr/brunchbook/shuvy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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