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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희 시인 Feb 24. 2024

겨울비 오는 날의 단상

아직은 詩가 되지 못한 나의 일상...

겨울비 오는 날의 단상

                                                이은희



비가 두껍게 내리는데 나는 막걸리를 서너 사발 이상을 마셔서 취하였고, 안양 중앙시장엔 비가 내리고 아직도 비가 잔뜩 도시를 집어삼키는 중이고, 젖은 채로 웅크린 도시는 며칠은 빳빳이 펴질 것 같지가 않고, 한때 잠시 사랑했던 이의 분신 같던 이른 봄 홀로 먼저 핀 진달래 꽃잎 같던 이제는 모퉁이가 나간 힘없는 우산 탓이었는지 아님 받쳐든 손 보다 빠른 보폭이 낡은 분홍 처마에서 내린 빗물을 지나버린 사랑의 쓸쓸함을 오롯이 다 받아낸 것인지 내 신발은 발등까지 온통 젖어서 이미 발의 감각은 무뎌지고,
겨울에 눈이 아닌 비가 오는 것은 내게 하얀 낭만에 대한 운치를 빼앗아버리는 만행 같고,

우리는 사방이 뻥 뚫린 지나는 시장 손님들과 붙박이 시장 상인들이 보는 무대 한 복판에서 릴케를, 백석을, 형도를, 하루키를, 쉼보르스카를, 그리고 이제는 실망이 더해져 애정이 식어버렸다는 울프를 얘기하고 있었지. 젖은 시장통 투명 포장마차에 앉아 갑자기 켜진 조명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새로이 시의 지원금을 받아 비까 번쩍한 호텔 같은 조명을 달게 됐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의미도 담지 않고 생각보다 길어진 해를 이야기했지.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거리를 바라보며 그래도 곧 봄이 올 거라는 그래서 생각보다 길어진 해가 당연하다는 뻔한 이야기를 나누었지. 아마도 더 이상 눈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 단골 포장마차 할머니의 근거리 과거를 자꾸 잊어버리는 슬픈 병을 앓게 된 사연에 다시는 그분을 볼 수 없을 당신과 나의 미래를 생각했지. 그러면서 나는 한 번쯤 더 뵀으면 하는 아쉬움 정도를 당신의 내색하지 않는 더 깊은 쓸쓸함을 말하지 않고 생각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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