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2 행복해지자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기억은 있습니다.
그 기억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할 뿐이지만. 만일 그 기억을 조금만 바꿀 수 있다면, 내 마음은 한결 편안해질 겁니다.
현실적으로 지나간 과거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내 기억을 약간 뒤집어 방향을 틀어 놓을 수 있다면, 당신은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공간으로 한 걸음만 들어오세요.
짙은 회색구름이 머리 위까지 내려앉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5일째 해를 보지 못했다.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상황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출근길이라 도로에는 차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은정은 딸 혜리를 학교 앞에 내려주기 위해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30분 동안 혜리와 한마디로 나누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은정의 질문에 혜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필요한 것을 카톡이나 문자로 보낼 정도였다. 엄마와 딸 간의 대화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은정은 혜리에게 우산을 건넸다.
-딸, 우산 잃어버리지 말고, 잘 챙겨 와. 오늘도 즐겁게 지내.
은정은 최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했다. 혜리는 은정을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신호등을 건너 학교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은정은 건널목을 건너가는 혜리를 보며 한숨을 지었다. ‘혜리야, 엄마도 힘들어. 제발, 엄마를 벼랑으로 몰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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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은행에 들어간 17년 차 은행원이다. 하지만 고졸이라는 족쇠때문에 5년 전 대리 승진이 마지막이었다. 그나마 대출상담으로 좋은 성과를 거둔 덕에 승진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좋은 대학과 좋은 스펙으로 입사한 후배들에게 밀려 여전히 창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명예퇴직 신청을 권고받았지만, 이제 중학생인 혜리를 생각하면 그만둘 수 없었다. 결국 은정은 외곽에 있는 대학교내 출장소로 발령을 받아 자리를 옮겼다. 그나마 시내 중심지에 있는 은행에 있을 때는 퇴근길에 혜리를 보러 갈 수 있었다. 이제는 그것도 어려워졌다.
출장소에 근무하는 직원은 4명이었다. 창구는 은정보다 10년 정도 어린 여직원과 함께 두 사람이 담당을 했다. 그래서 항상 점심은 따로 먹어야 했다. 은정은 편하게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었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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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건물 뒤편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남은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른쪽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의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 창구에서 연락이 왔을까 봐,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어 화면을 확인하였다. 혜리의 담임선생이었다. 은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냥 끊어지길 기다리는 듯 화면만 주시하였다. 하지만 전화벨은 계속 울리며,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지내시죠.
한 옥타브 높게 목소리를 올려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넸다.
-아네, 안녕하세요. 어머니.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갑게 은정의 달팽이관을 흔들었다. 은정은 긴장하며, 담임선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몇 초간 말이 없었다. 담임선생의 행동은 은정을 불안하게 하였다.
-선생님, 말씀하세요. 듣고 있어요.
은정은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 혜리문제로 학교에 지금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되도록 빨리 오시는 게….
담임선생은 더 이상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차가운 말투에는 짜증도 섞인 것 같았다. 은정은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담임선생의 말투에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은정은 전화를 끊고, 출장소로 들어갔다. 안쪽자리에 앉아있는 차장에게 다가갔다. 은정보다 2살 어린 차장은 평소에도 은정을 불편해하였다. 은정의 사정을 알고 있지만, 하필 자기 밑으로 와서 분위기를 흐린다고 생각하였다.
-차장님, 죄송한데 오후에 반차를 사용하고 싶은데요. 제가 엊그제부터 몸이 안 좋았는데, 점심 먹은 게 체한 것 같아요.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은정은 고개를 숙이고 말을 했다. 도저히 눈을 마주치고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딸 문제가 은행 사람들 사이에서 가십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다. 차장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은정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네, 그러세요. 나이도 많으신데, 몸 관리 잘하셔야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은정에게 핀잔을 주었다. 은정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모니터를 보며 혼잣말인 듯 한마디 더 건넸다.
-주욱 쉬어도 되는데, 굳이….
은정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창구로 갔다. 창구에 앉아 있던 여직원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하고는 서둘러 출장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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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고 혜리네 학교로 가는 길은 전혀 막힘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천천히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녀의 바램을 무시하였다. 은정은 아침에 혜리 얼굴을 기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었던가. 하지만 혜리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웃지도 않고, 무표정의 얼굴. 그 얼굴이 은정이 기억하는 혜리의 얼굴이었다. 중학교 1학년때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혜리도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학원 갔다가 돌아오면, 곧잘 식탁 의자에 앉아 오늘 하루의 일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렇게 나쁜 모녀사이는 아니었다. 바쁘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도와주지는 못 하더라도,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2학년이 된 후 벌써 2번이나 학교로 불려 갔다. 2번 모두 같은 반 급우와의 다툼이었다. 키가 작고, 왜소한 혜리였지만, 큰 애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기질이 있었다. 은정은 혜리를 나무라지 않았다. 혜리의 생각과 판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교무실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갔다. 수업 중이라 선생들은 자리에 거의 없었다. 혜리의 담임선생은 자리에 있었다. 은정은 죄인처럼 무겁고, 낮은 걸음으로 조용히 담임선생의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은정은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담임선생은 은정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 일어섰다.
-어머니, 상담실로 가시죠.
담임선생은 차갑게 말을 하고, 앞장서 걸어갔다. 은정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상담실에는 혜리가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혜리는 고개를 들어 은정을 쳐다보고,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을 아주 잠깐 지었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담임선생은 은정에게 설명을 하였다. 혜리가 같은 반 친구에게 커터칼로 손등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었다. 양호선생이 병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 문제가 될 것 같다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상황 설명을 했다. 은정도 커터칼이라는 말에 많이 놀란 듯 혜리를 쳐다보았다.
-혜리 어머니, 혜리의 진정성 있는 반성이 없을 경우 문제가 크게 될 소지가 있습니다. 은정은 마치 자신이 선생의 꾸지람을 듣듯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담임선생의 차가운 말들이 비수처럼 은정의 가슴을 짓눌렀다. 은정은 탁자에 머리가 닿을 듯 고개 숙이며 말을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쪽 부모님을 만나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은정의 말이 끝나자, 담임선생은 자리에게 일어났다. 담임선생의 차가운 눈빛에 은정은 죽을죄를 지은 듯 굽신거렸다.
-박혜리, 반성문 제출해하고, 어머니 따라 집에 가도록 해.
-혜리어머니, 학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징계가 내려질지 모르겠네요.
담임선생은 마치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선을 그었다.
은정은 혜리를 데리고 나와 주차해 놓은 곳으로 걸어갔다. 은정은 당장이라도 혜리를 붙잡고 왜 그랬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주차장까지 최대한 화를 누르며 걸었다. 차 문을 열자, 혜리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탔다. 은정과 대화를 안 하겠다는 태도였다. 은정은 운전석에 앉아 고개를 돌려 혜리를 바라보았다.
-엄마에게 할 말 없니? 뭐 때문에 이러는지….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학원에 데려다줘.
-지금 학원이 문제야. 너 거기 가서 공부는 하니, 지금은 엄마에게 잘 못 했다고, 앞으로 안 그럴 거라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거 아니니.
혜리는 은정을 원망의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언제는 바…바쁘다고 다음에 이야기하라며, 힘..힘드니 알아서 하라며, 왜 이제와 엄마 역할 하고 싶은데. 학교..학교 그만두면 되잖아. 어차피 다들 날 벌레 보듯 피..피하고, 손가락질하는데.. 이제 다 필요 없다고.
혜리는 은정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나왔다. 혜리는 차문을 벌컥 열고는 그대로 교문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은정은 혜리의 고함소리에 귀가 먹은 듯 초점 없는 눈빛으로 혜리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혜리가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은정은 차에서 내려 교문 쪽으로 달려갔다. 혜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버렸는지, 찾을 수 없었다. 은정은 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았다. 여태껏 눌러왔던 울음이 한순간 댐이 무너지듯 터져 나왔다. 은정은 커억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더니, 이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10여 분동 안 울고 난 은정은 잠시 멍하니 앞을 쳐다보다, 시동을 걸었다. 서서히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학교 교문을 빠져나왔다. 퇴근시간이 아니지만, 도로에는 여전히 차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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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의 차는 다른 차들 사이에 자신의 흔적을 숨긴 채 어디론가 내달렸다. 20여분을 달리던 차는 어느 아파트 입구 차단기 앞에서 멈추어 섰다. 은정은 그제야 여기가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여긴. 은정의 입에서 낮은 탄식소리가 나왔다. 뒤에서 가벼운 클락션 소리가 들렸다. 은정은 차단기 옆에 경비실 호출버튼을 눌렀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파트를 잘 못 찾아왔네요. 돌려서 나갈 테니 잠시 차단기 좀 열어주세요.
은정은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차를 몰고 왔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산 아파트였고, 죽은 남편과 10년을 살았던 너무나 익숙한 동네였다. 차단기가 열리자 그녀는 차를 몰아 아파트 안으로 진입하여 두 번의 좌회전과 한 번의 우회전을 하여 101동 앞에 차를 세웠다. 한동안 차는 시동이 걸린 채 그 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잠시 후 시동이 꺼지고, 그녀는 차에서 내렸다. 101동 앞 놀이터 벤치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네에서 혜리가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남편이 그네를 탄 혜리를 밀어주고 있었다. 행복했던 기억들이 방울방울 눈물에 새겨져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은정은 아파트를 나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하였다. 시립 도서관 옆 혜리가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혜리를 데리고 자주 갔던 분식점도, 남편 친구가 운영하던 카페도 그대로였다. 그녀는 사라진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듯 이리저리 동네를 돌아다녔다. 익숙하고 정겨운 동네였지만, 남편이 죽은 뒤 도망치듯 강남 대치동으로 이사를 했다. 혜리의 공부를 위한다는 이유로 급하게 아파트를 팔고, 남편의 보상금을 합쳐 대치동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이 동네에서 더 이상 살 자신이 없었다. 모든 장소와 공간에 남편과의 추억이 물들어져 있었다. 은정은 남편과 10살 차이가 났다. 그래서 남편은 은정을 어린아이 보살피듯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었다. 그 덕분에 은정은 모든 결정과 고민을 남편에게 미루었다. 너무나 의지하고, 믿어왔기에 그녀는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은정은 딸 혜리만 보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녀는 성지순례 하듯 남편의 흔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지만, 발바닥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 상황에도 어김없이 허기짐이 느껴졌다. 은정은 자주 산책하던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아 종아리를 주물렀다. 혜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집에서 혜리를 보고 어떤 말을 해야 할런지, 앞으로 은행을 계속 다녀야 할런지….그녀가 결정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지만, 회피하고 싶었다. 짙은 회색 하늘을 어둠이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때맞추어 비가 흩뿌리져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은정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벤치에서 일어났다. 공원의 가로등이 하나, 둘 주변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 내 산책로를 벗어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은정의 머리와 어깨는 비에 젖어 애처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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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만 보며 걷던 은정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환하게 빛을 내는 낯선 간판이 보였다. 그녀는 상점을 지나가다, 흘끗 쳐다보았다. 상점의 진열장 너머로 비치는 황금빛 조명은 따스한 기운을 풍겼다. 은정은 뒤돌아섰다. 어차피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혜리가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었다. 그녀는 상점의 간판을 다시 쳐다보았다.
‘蓮花世界연화세계’
은숙은 피식 웃었다. 고등학교 때 불교 동아리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때 알게 된 말이었다.
그래 그런 세계에 가고 싶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가고 싶다. 은숙은 간판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상점 출입구 앞에 다가섰다. 유리문 안쪽에 한옥스타일의 격자무늬로 장식되어 있어 상점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유리문 중간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점원 2명이 은정을 보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은정은 상점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중앙에 달린 샹들리에가 황금빛을 은은하게 흩뿌리고 있었다. 벽에 붙은 진열대에는 고급스러운 다기세트가 진열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된 듯, 하지만 우아한 자태는 박물관에서 보던 백자 도자기와 달라 보였다. 그리고 거기 맞는 다양한 차(tea)가 보였다. 남편은 스트레스로 인한 위장질환이 심하여 카페인이 든 커피를 못 마셨다. 커피 대안으로 한동안 루이보스차를 마셨다. 남편과 주말에는 디카페인 차를 마시며, 일주일 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는 하였다. 주로 남편이 들어주는 편이었다. 은정이 내부를 둘러보는 동안 점원은 한발 떨어져 바라볼 뿐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작은 평수였지만, 고급스럽고 세심한 내부 인테리어에 그녀는 잠시나마 몰입되었다. 한동안 둘러본 은정은 이내 점원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마음이 닫혀버린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은정의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점원은 조용히 다가와 따스한 미소로 말을 건넸다.
-찾으시는 종류가 있으시나요?
점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은정은 경직되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아, 아니에요. 찾는 건 따로 없어요. 그저 지나가다 분위기가 너무 좋아 한번 들어와 봤어요.
은정은 솔직하게 말을 했다.
-고맙습니다. 그냥 편하게 보시고, 좋은 차 시음 한번 해 보세요. 저기 소파에 앉아 계시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점원은 소파를 가리켰다. 은정은 다시 한번 내부를 둘러보고,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소파의 느낌이 너무 안락하고 편하여 허리 쪽 힘을 빼며, 소파에 안기듯 앉았다.
점원은 손바닥 크기의 둥근 유리병을 가져왔다.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은정에게 유리병 내부를 보여주었다.
-감잎차입니다. 호흡기 질환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예전부터 환절기에 많이 드시죠. 비타민 c가 풍부하여 면역력에도 좋습니다.
점원은 설명을 하며, 끓는 물이 담겨 있던 탕관에서 숙우로 물을 옮겨 부었다. 다시 숙우를 받쳐 들어 찻잔에 물을 부었다. 이내 찻잔의 물을 퇴수기에 붓고, 원래 자리에 가지런히 놓았다. 동작이 너무 기품 있어 마치 귀한 대접을 받는 느낌이었다. 점원은 탕관에 말린 감잎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받은 숙우의 물을 천천히 탕관에 부었다. 3분 정도 지난 후, 찻잔에 감잎차를 따라 주었다. 은정은 떫은 감을 생각한 듯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아…. 전혀 떫은맛이 없네요. 잘 익은 감에서 맛볼 수 있는 단맛과 고소한 맛이 느껴지네요.
은정은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가 마셨다.
-네, 보통 감잎차라고 하면 떫은맛을 생각들 하시죠. 6월에 어린 감잎을 따서 만든 차입니다. 보통 좋은 녹차에서 느껴지는 깊은 맛도 있고요. 여성들에게 좋은 차입니다. 생리통과 피부 미용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점원은 마치 은정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그녀의 몸 상태에 맞는 차를 준비한 것 같았다. 은정이 내려놓은 찻잔에 다시 감잎차를 따라 주었다. 기도를 타고 천천히 내려가는 차의 따스함이 온몸에 퍼졌다. 은정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상황에서 잠시나마 벗어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점원은 은정에게 다른 차를 더 마셔보겠냐며 물었다. 은정은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에 흔쾌히 점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점원은 티마스터를 통해 더 좋은 차를 시음하실 수 있다며 은정에게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하였다. 얼떨결에 은정은 점원을 따라 일어났다. 점원은 진열대를 지나 벽의 모서리부근을 살짝 밀었다. 마치 비밀의 문이 열리듯 벽이 안쪽으로 움직였다. 은정은 당황한 듯 그 자리에 서서 지켜만 보았다. 천정에서 내려오는 간접등의 불빛에 벽과 문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점원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은정은 잠시 점원이 사라진 문을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발바닥을 옮겼다. 마치 미행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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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있던 은정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며, 짧은 탄식을 뱉었다.
-아, 여긴…
은정의 눈에 들어온 내실은 은은하게 분홍빛이 감돌았다. 마치 벚꽃 잎이 봄바람에 날리는 듯 분홍빛 조명등이 설렘을 자아내었다. 은정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벚꽃이 가득한 여의도 길 남편과 첫 데이트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수줍음으로 가득 찬 첫 데이트에서 벚꽃 구경 나온 사람들에게 밀려 차도 쪽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은정의 손을 잡아주었던 남편. 은정은 그때의 설렘과 그리움이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교차되어 은정의 눈앞을 지나갔다. 누군가 입구 앞에 서 있는 은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존재를 뒤늦게 깨달은 은정은 눈물을 닦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리로 오세요. 오늘 많이 힘드셨죠.
은정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연화세계 티마스터 황인숙입니다.
-아네, 안녕하세요. 여긴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아요.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받은 느낌이네요.
은정의 말에 인숙은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은정은 인숙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나도 저렇게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다.’
은정의 눈에 비친 인숙은 깔끔한 단발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중간중간 비치듯 보이는 흰머리가 기품 있고, 전문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웃을 때 보이는 주름은 인자함과 따스함을 풍겨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끔 하였다.
-보시는 것처럼 여기에는 차 종류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흔한 들꽃도, 사람들이 무시하고 밟고 다녔던 잡초들도 모두 자기의 이름이 있죠.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우리에게 좋은 차를 선물해 주죠.
인숙의 말에 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정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벽에는 여러 종류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오래된 흑백사진부터 칼라사진까지. 모두가 차를 수확하거나 말리는 작업을 하는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모두 한 사람의 모습만 담겨 있었다. 점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인숙은 자리에 일어나 내실 가운데 원목 테이블로 걸어갔다. 테이블에는 다양한 차 재료가 들어있는 유리병들이 보였다.
-차 재료를 직접 기르고, 수확하는 것까지 하시나 봐요. 정원에 예쁜 꽃들을 심고 그 꽃이 만발하면 가져다 말려서 차로 내려서 마시고...그러면 항상 그 꽃들과 같이 있는 거네요.
은정의 부러움이 섞인 말투에 인숙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투정 부리는 4살 딸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사랑스러운 미소 같았다.
-제가 여기 있는 몇 가지 재료를 섞어서 새로운 차를 블렌딩 할 거예요. 한번 시음해 보시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기분도 좋아질 겁니다.
인숙의 말에 은정은 한껏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숙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차시로 무언가를 꺼내어 도장기로 된 믹싱볼에 담았다. 작은 서랍장의 오른쪽 하단의 서랍을 열어 짙은 갈색빛의 마른 잎을 가져와 믹싱볼에 다시 담았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5개의 호리병 중 하나를 들었다. 긴 스포이드를 조심스럽게 호리병 안으로 넣었다. 그리곤 스포이드에서 액체 두 방울을 믹싱볼 위에 떨어 뜨렸다. 인숙은 재료를 다시 섞었다. 천천히 블렌딩한 차 재료를 다관에 넣었다.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숙우를 받쳐 들고, 천천히 다관에 물을 부었다. 5분 정도 차를 우려된 뒤, 찻잔에 차를 부어서 은정에게 내어주었다. 은정은 공손하게 찻잔을 들어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연한 분홍빛의 찻물에서 벚꽃 향기가 났다.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입안 가득 첫사랑의 설렘이 가득 퍼졌다. 은정은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감아 그 향을 음미하였다.
잠깐 눈을 감은 사이에 멀리서 한줄기 빛이 보였다. 그 빛은 은정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 빛은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은정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괜찮아요. 문을 열어보세요.
그 목소리는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숙의 소리였다. 은정은 동그란 고리형태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다급하게 뛰어가는 발소리, 누군가 울먹이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은정은 눈을 떴다. 어느 건물의 복도 중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잠시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복도 끝에 응급실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은정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박주호씨 가족분이신가요. 여기 동산병원 응급실인데요, 박주호 씨가 교통사고로 지금 응급실로 오셨어요. 빨리 이쪽으로 오셔서 수속을 밟을 셔야 합니다. 여보세요. 듣고 계시나요.
다급함이 전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은정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네, 제가...제가 박주호 씨 아내입니다. 지금 동산병원 응급실 앞이요. 바로 갈게요.
은정은 복도를 달려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가 보이고, 환자용 침대마다 신음하는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환자와 보호자, 간호사 모두가 엉켜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은정은 정신없이 남편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박주호 씨 가족분이세요?
은정은 뒤돌아 보았다. 앳된 얼굴의 간호사가 은정에게 말을 건네었다.
-네, 맞아요. 남편은 어디에 있죠?
-저기 남자 의사 선생님 보이시죠. 그쪽으로 가세요.
은정은 간호사가 가리키는 쪽으로 뛰어갔다. 피범벅이 된 와이셔츠는 찢겨 가슴이 다 보였다. 의사는 간호사에게 연신 뭐라고 말을 하며,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은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안돼, 그러지 마, 나 버리고 가면 안돼.’ 은정은 힘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혼잣말을 하였다.
간호사는 바이탈 사인 모니터를 보며, 의사에게 다급하게 말을 하였다. 은정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가족분이시죠, 이리로 오세요. 환자분이 뭐라고 하세요.
간호사가 은정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은정은 현기증을 느끼며, 몸이 살짝 기우는 것을 느꼈다. 은정은 간호사의 팔을 잡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남편 곁으로 걸어가 피투성이의 남편 얼굴을 보았다. 희미하게 뜨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은정은 남편의 손을 잡으며 오열하였다.
-오빠, 안 돼요. 날 봐요.
은정의 목소리에 남편은 뭐라고 다시 말을 하려고 했다.
은정은 남편의 입가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은정아...미..미안해. 혜..혜리 부탁….
바이탈 신호는 더 이상 남편의 시간을 이어가지 못했다.
-안돼, 그러지 마…
절규하듯 남편을 부르며 은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흐느끼며 울던 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의 손을 잡으며 말을 했다.
-오빠, 혜리는 걱정 마, 내가 당신 몫까지 할게. 먼저 가서 기다려….사랑해.
**
-연분홍 벚꽃 잎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죠. 인숙의 목소리에 은정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인숙의 부드러운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레몬밤의 산뜻한 향기가 벚꽃과 어우러져 싱그럽고 깔끔함을 느낄 수 있죠.
차에 대한 설명을 듣는 동안 은정은 눈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았다.
-벚꽃의 꽃말은 동양과 서양이 달라요. 또 나라마다 의미하는 것도 다르죠. 저는 벚꽃의 꽃말을 미소라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무겁지 않게 미소 지으며 보내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
인숙은 어느새 은정 앞에 서 있었다. 인숙은 무릎을 굽혀 앉으며, 은정을 안아주었다. 인숙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은정을 등을 토닥거려 주는 느낌은 마치 예전에 남편이 은정을 안아주면서 토닥거려 주던 느낌이었다.
-고맙습니다. 남편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킬 수 있게 해 주셔서.
은정은 남편의 사고당시 은행 교육연수로 2박 3일 동안 천안연수원에 내려가 있었다. 은정이 남편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갔을 때는 너무 늦어 남편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했다.
-남편은 응급실에 누워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마지막 인사도 나눌 사람도 없이. 정말 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였어요.
은정은 지금 상황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가슴으로 자신이 신에게 위로받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숙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후회와 이별을 반복하며 살곤 하죠. 그중에는 가슴에 상처가 되어 평생 지우지 못하는 일들이 있어요. 그 상처를 잘 아물게 하는 것이 남겨진 우리의 삶이죠.
인숙의 인자한 미소에 은정은 더 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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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은 다시 테이블 위 유리병에서 꽃잎과 마른 잎을 꺼내어 블렌딩 하였다. 이어서 다관에 블렌딩한 재료를 넣고 따뜻한 물을 부었다. 은정은 조용히 인숙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다음 차를 기다렸다. 우러진 차를 품은 찻잔이 은정 앞에 놓여졌다. 연한 갈색의 찻물은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은정은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 입 안에 머금었다. 입안 가득 달달함이 가득 차올랐다. 단맛의 따뜻한 찻물이 기도를 타고 내려갔다. 긴장되었던 몸이 살짝 풀리는 느낌이었다. 은정은 음미하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앞에 보이는 동그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엄마, 엄마…
혜리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혜리는 은정의 다리를 잡고 투정을 부렸다.
- 유치원에 안 가고 싶어. 엄마랑 놀고 싶어. 응...나랑 놀아줘.
은정은 다리에 매달려 있는 혜리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앉았다. 혜리의 눈 높이 맞추어 쳐다보며 은정은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 혜리야, 엄마가 미안해, 이제 절대로 피하지 않을 게. 엄마가 우리 공주님 꼭 지켜줄게.
은정은 혜리를 친정엄마에게 잠시 맡겨두고, 혜리의 유치원으로 찾아갔다. 은정은 원장실에서 유치원 원장을 마주했다. 원장의 단호하게 앙다문 입과 짜증 섞인 눈빛은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였다.
적막한 분위기를 깨며 은정은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하려고 했다. 그때 원장이 말을 가로채듯이 먼저 말을 했다.
-혜리 어머니, 왜 지난 일을 들춰내려고 하세요. 제가 충분히 사과드렸고, 혜리도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늦게 퇴근하시는 날은 특별히 저희가 혜리를 더 챙겨봐 드리잖아요.
원장은 앙칼진 목소리로 은정을 나무라듯 말을 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혜리가 부원장님에게 상습적으로 폭행당했고, 아직도 혜리는 유치원 가는 걸 너무 무서워합니다. 그냥 단순히 미안하다고….
은정의 말을 끊으며, 원장은 목소리 높여 말을 했다.
-아니, 말 이상하게 하시네. 부원장이 그랬다고 누가 그래요. 혜리가 그래요.
매서운 눈으로 은정을 쳐다보더니 이내 달래듯 차분하게 말을 했다.
- 혜리 어머니, 정말 유치원 안 다닐 거예요? 혜리가 여기서 나가면 다른데도 못 갑니다. 제가 그 정도 힘도 없을 것 같아요.
무릎 위에 놓인 은정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은정의 눈가는 눈물방울이 맺혔다.
-정말 우리 혜리에게 손톱만큼이나 미안한 감정이 있으세요. 부원장이 따님이 아니라면 이 문제를 이렇게 무조건 덮었을까요. 정말 우리 혜리만 맞았을까요. 정말 상습폭행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어느새 은정은 원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저는 여기에 우리 혜리 더 이상 보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진실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할 겁니다.
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장은 은정의 말에 놀랐는지, 자리에 앉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등을 돌려 나가는 은정에게 말을 했다.
-네, 모든 잘 못이 우리 유치원에 있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마음대로 해 보세요. 세상이 싱글맘 이야기를 얼마나 귀 담아 들어줄련지.
원장은 씩씩거리며 은정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은정은 원장실 문을 열고 나와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린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율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은정은 주먹을 꼭 쥐었다.
은정은 친정집으로 갔다. 마당에서 강아지랑 놀고 있는 혜리를 발견하였다. 혜리도 은정을 발견하고 달려와 품에 안겼다.
-혜리야, 재미있어?
-응, 좋아. 엄마 나 유치원 가. 할머니가 엄마 일 해야 해서 내가 유치원 다시 가야 한데. 엄마 내가 유치원 가서 밥도 잘 먹고, 율동도 열심히 하면 안 혼난다고 할머니가 그랬어. 엄마 힘들게 하지 않을게.
은정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혜리를 꼭 껴안았다.
-혜리야, 이제 유치원 안 가도 돼. 엄마가 지켜줄 거야. 그리고 엄마가 비겁하게 숨지 않을 거야. 엄마가 당당히 싸울 거야. 걱정 마.
-엄마, 비겁이 뭐야. 왜 엄마가 싸워? 싸우면 나쁜 거잖아.
혜리의 질문에 은정은 웃으며 혜리를 번쩍 안아 올렸다.
**
-수국차는 스님들이 자주 음용하는 차입니다. 사람들은 감차, 이슬차, 수국차라고도 부르는데, 꽃보다는 잎을 이용하여 차로 마십니다.
인숙의 목소리에 은정은 감았던 눈을 떴다.
-달달한 맛도 느껴지고, 깔끔함도 느껴지네요.
은정은 차에 대해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네, 감차 나무에서 꽃보다는 잎을 따서 말립니다.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고, 그 비를 맞고 자란 나무가 바로 감차라고 합니다. 재미있죠.
-당도가 설탕의 천배가 넘는 감차 잎과 차분하고 깔끔함을 전해주는 라벤더 허브가 어우러진 차입니다.
인숙의 설명에 은정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감차의 꽃말도 있나요?
은정의 질문에 인숙은 미소 지으며, 은정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감차꽃의 꽃말은 변하기 쉬운 마음이에요. 우리는 주변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고는 하죠. 잘 못된 결정인 것을 알면서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라고 애써 스스로에게 위안을 건네죠.
인숙의 말에 은정은 찻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 테이블 위에 찻잔을 떨어뜨릴 듯 내려놓았다. 은정의 눈이 불그스레 충혈되었다. 이내 눈물이 글썽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을 했다.
-맞...맞아요…. 저는 제 딸이 내민 손을 외면했어요. 싱글맘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주변 사람들이 저를 이해해 줘야 한다고... 저는 모든 걸 피하기만 했어요. 그러는 사이 제 딸은 한동안 대인기피증과 실어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어요. 혜리가 그 힘든 시간을 혼자 견뎌냈어요.…흑흑
-아니에요. 잘해 왔어요. 그 누구보다도.
한참을 울고 어느 정도 가라앉은 은정을 기다려주었던 인숙은 다시 새로운 차를 블렌딩하기 시작하였다.
한바탕 쏟아내고 난 은정의 얼굴빛은 밝아져 있었다. 지치고 상처 입어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조금이나마 다독여지고 있었다.
**
인숙은 따뜻한 엄마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새로운 찻잔을 내어놓았다. 은정은 인숙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인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정은 찻잔 속을 바라보았다. 맑은 초록과 노랑이 어우러진 찻물이 조금씩 출렁이듯 보였다.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 향을 맡아보았다. 달달하고 깊은 꽃향이 느껴졌다. 한 모금 입 안에 머금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자연스럽게 눈앞에 보이는 동그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교복을 입은 여러 명의 여학생들이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엄마, 떡볶이 2인분, 튀김 1인 추가예요.
혜리의 밝은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어, 뭐라고…
은정은 얼빠진 사람처럼 혜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모, 저희 라면 3개랑 떡볶이 2인분 주세요. 많이요.
가게 문턱을 넘어서던 여학생 3명이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주문을 해 왔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혜리는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은정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혜리 쪽을 쳐다보았다.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 다니며 주문을 받는 혜리. 은정은 빠르게 손을 움직여 접시에 떡볶이와 튀김을 담아서 내어주었다. 그리고 냄비에 뜨거운 물을 부어 라면을 끓일 준비를 하였다. 따뜻한 햇살이 가게 안을 가득 메우고, 즐겁게 웃는 혜리를 보며 은정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다른 길도 있어,’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사고사 이후 도망치듯 떠났던 동네로 다시 돌아왔다. 모두가 반겨주며 그녀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은행을 그만두고, 여자중학교 앞에 분식점을 열었다. 혜리도 가까운 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은정은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도망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개나리 꽃의 밝은 기운과 달달하고 깊은 향의 허니부쉬 향이 느껴지셨나요.
인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봄의 전령 개나리꽃은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을 줍니다. 거기에 달달한 허니부쉬 향은 마음을 더 편하게 해 주죠.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 기대를 뜻해요.
은정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은정은 밝게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은정은 인숙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희망이라는 이미지를 가슴속에 소중히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