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3 신과의 내기
과하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늘어지지 않게/ 간결한 문체와 스토리/
숙제를 안고 이번 소설은 에피소드 #3에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좀 더 발전된 글로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지옥의 문턱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인옥은 사자의 뒤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 지옥의 재판관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어디로 끌려가 형벌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받는 순간이었다. 재판관 옆에 서 있던 눈이 세 개 달린 사자는 연신 재판관에서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다. 짙은 회색빛의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재판관은 끌어 오르는 화를 누르고 있었다.
-저 인간은 왜 매번 문제를 일으키냐, 그래 얼른 천계로 보내 거기서 결정하게끔 해.
재판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쪽 벽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일어나, 한마디라도 하면 불구덩이에 쳐 넣어줄테다.
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장섰다. 인옥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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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의 문 앞에서 사자는 걸어온 길로 다시 돌아섰다. 여유롭게 인옥은 사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는 거기서 보지 맙시다.
인옥의 조롱 섞인 인사에 사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천계의 문 지기는 인옥을 향해 손짓을 했다.
-자 시간 없다. 신께서 기다리시니 여기 정원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거라.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천계의 문이 열리고 인옥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지막한 언덕에 서 있는 물체라고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뿐이었다. 인옥은 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나무 아래에는 두 명의 신이 바둑판을 두고 마주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소리 하나 없이 너무 고요한 분위기에, 바둑판만 쳐다보고 있는 신도 조금의 미동도 없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느낌이었다.
-또, 너냐, 넌 도대체 뭐가 문제냐.
침묵을 깨고 바둑판에 앉아 있던 신은 인옥 앞에 서 있었다. 아니 바둑판 앞에는 2명의 신이 여전히 바둑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신은 어느 자리에도 있고, 어느 시간에도 있다는 말처럼 지금 인옥 앞에 서 있는 신이 정말 신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문제는 무슨, 그래서 환경은 바뀌어도 사람의 본성은 안 바뀐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그리고 지아비라는 놈은 매일 술 먹고 아랫사람들을 개 패듯 때리고 다닙니다. 거기다 노비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15살도 안된 계집애를 첩으로 들이는 게 이게 사람입니까? 그런 놈은 지아비가 아니라 임금이라도 죽어야죠.
인옥의 거침없는 언사에 신은 피곤하다는 듯 손을 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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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옥이 지아비의 밥에 독을 풀어 죽이고 자신도 대들보에 목을 메어 자살을 하였다. 인옥의 나이 25살 때였다. 인옥이 환생 전 신과 긴 언쟁을 벌렸다. 자신의 과거 환생이력이 모두 인간의 악한 마음에 의한 것이며, 이는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힘든 것이다. 좋은 환경, 좋은 사람을 만나도 언젠가 인간이 악해질 수밖에 없는 인생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곧 그 사람의 본성에 내재된 기본적인 성향에 의한 것임으로 고치려 해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이 인옥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태어날 때 착한 심성을 가지게 하였지만, 외부 환경에 의해 변화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좋은 환경, 좋은 사람들이 모여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신의 의도이니 함부로 벗어나거나 자살을 하면 큰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인옥과 신의 긴 언쟁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결국 신은 인옥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양반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나 좋은 집안과 연을 맺어 굴곡 없는 인생을 살아보게끔 환생을 시켰다. 하지만 결국 인옥은 지아비를 독살하고, 자살을 하여 다시금 저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너는 다른 아낙네들처럼 그렇게 선한 마음으로 넘어가도 될 일을 마치 네가 심판관인 듯 나서서 행동을 하니 이런 사단이 생기지 않느냐. 그리고 너의 목숨이 어디 너의 것이냐, 어디 함부로 목숨을 끊느냐.
신의 화난 목소리에 인옥은 지친 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저에게 주어지고 제가 가진 거라고는 이 목숨 하나뿐인데 왜 제가 선택하면 안 되는지요.
신은 인옥에게 형벌을 내렸다. 기간은 백 년.
-인간은 착한 심성을 가졌지만 주변 환경과 상황에 따라 상처 입고 망가져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바닥까지 떨어지곤 한다. 너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다시 착한 심성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이게 너의 벌이다.
-신께서는 왜 인간의 심성을 착하다고 믿지 않는 저에게 이런 벌을 내리시나요. 제가 틀렸다는 것을 저에게 꼭 보여줘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너를 지옥불에 던져 버리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갈수록 흉해지는 인간세계를 바로 잡아야 할 일도 중요하다. 너는 그 중요한 일에 하나의 초석이 되어 너의 가치를 증명해 보거라. 너에게 100년의 시간을 주마. 그 시간 동안 너를 지켜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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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옥은 그 길로 다시금 이승으로 내려왔다. 이제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으나 늙지 않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100년의 시간을 보장받은 채로.
이승으로 내려오는 길에 잠시 천계에 머물러 있을 동안 나비 2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인옥이 인간세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옆에서 도와줄 조력자가 되어줄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렇게 인옥은 이승으로 내려와 처음 문을 연 것이 주막이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내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남정네들의 추태와 욕설, 비이성적인 인간의 내면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술은 이성적이어야 하는 사람을 비이성적인 욕구를 분출하게 만드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인옥과 함께 주막을 운영한 두 사람은 천계에서 데려온 나비였다. 나비들에게 이름을 별과 달로 칭하자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 인옥의 곁을 지켰다. 인옥의 첫 번째 주막은 상처만 남기고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두 번째는 무당집이었다. 현실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할 수 있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위로받고, 그들의 앞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돌아갔다. 하지만 곧 용하다는 소문이 돌자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수시로 찾아와 인옥에게 더 많은 욕심을 채울 방법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인옥은 1년 만에 야반도주를 하였다. 그들을 쫒는 사람들을 피해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숨어들어 거기서 지친 마음과 육신을 쉬었다. 인옥은 오두막집을 짓고 작은 밭과 꽃밭을 만들었다. 세 사람은 거기서 사계절을 보냈다. 봄꽃 향기가 지천으로 가득한 오후 세 사람은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신이 보낸 사자가 찾아와 인옥을 재촉하였다.
-너에게 남은 시간은 95년뿐이다. 너는 신과 약속한 대로 삶의 절벽 끝에 매달린 인간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여 다시금 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를 해야 한다. 그리하여 네가 인도한 인간이 자살하지 않고 제 수명을 다하면 천계에 약속의 정원, 그곳에 신선화가 한송이 피어나게 된다. 그 신선화가 100송이가 되어 꽃밭을 이루게 되면 너의 소임은 다 한 것으로 보겠다.
-제가 사람들을 평생 쫓아다닐 것도 아니고 어떻게 잘 위로해 주어도 다음에 또 다른 고비가 오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이건 억지입니다.
사자는 인옥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아직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가 버렸다.
신의 의도대로 신선화 100송이가 피어나게 되면 인옥은 신과의 내기에서 지는 것이고, 인옥의 말대로 인간은 교화되지 않는 존재이라면 내기에서는 이기게 되겠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벌로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
인옥은 답답한 마음을 꽃차를 마시며 달래고 있었다. 그때 든 생각이 찻집을 열어 사람들을 위로하는 게 어떨지 생각하였다. 대신 아무나 찾아올 수 없도록 비가 오는 날에만 문을 열어 지친 사람들을 받겠다고 결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