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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크무슈 Sep 25. 2022

덕업일치를 이룬 감상

들어가며



최근 외국계 회사를 다니다 대기업으로 이직을 했다.


큰 결심과 실행에 적당한 운이 함께 따라준 덕분에, 국내 주(酒)류 대기업의 브랜드 마케터가 되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니 빈약하니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간절히 원하던 일이라 개인적으로는 큰 성취라 할 수 있겠다.


나는 맥주를 아주 좋아한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의상 성인 이후라고 하자) 마신 맥주를 일렬로 세우면 지구에서 달까지는 못 가더라도 서울에서 부산 아니, 제주도까지는 가지 않을까.


재미있게도 내 인생의 많은 사건은 실제로 맥주와 엮여있다. 이제부터 실컷 맥주 이야기를 할 테니 지금은 조금 참는 걸로.


그렇다. 나는 '맥주' 브랜드 마케터가 되었다.




두 번째 직장을 빛의 속도로 그만뒀다.


외국계에 규모도 큰 나름 걸출한 회사였기에 딱히 퇴사할 거창한 이유가 없었지만, 입사 후 두 달을 겨우 채운 시점에 퇴사를 하게 됐다. 어딜 가나 별로인 사람은 있고,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마땅히 이해하며 일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당시에는 이런 생각에 마냥 빠져들어 있었다.(둘 다 해당된다는 소리다)


내 몇 가지 없는 장점 중 하나는 가능한 일기를 매일 쓰려고 하는 것인데, 도대체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해지는 밤이면 굳이 그날 일기를 열어본다.


 일을 할 의욕이 없다.
 곧이어 내 밑천이 드러날 텐데, 사실 그 순간을 짐짓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승산 없는 최후의 전투를 앞둔 선봉장의 독백같은, 자포자기와 결연함의 중간쯤 어느 마음가짐이었나보다.


보기 좋게 사직서를 내버렸다.

대책없이 그만 둔 만큼 '적응에 실패한 이직자'로 받아들여 스스로 절망에 빠지는 것을 가장 경계다. 감사하게도 주변에서 함께 일하자는 분들이 많아,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도움을 받진 않았다. 이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나서 진심을 다해 감사를 전했다.)


누나도 큰 힘이 되었다. 혹여 내가 무기력감이나 우울감에 빠질까 부단히 나와 대화를 해주었다. 심지어 밥을 제 시간에 먹었다는 답장에 열 줄이 넘는 문장으로 칭찬해주었다.


누나와는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남남인 척 살지만,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어떻게 알고 나를 구원해주러 온다.


우리 누나는 위로를 참 잘한다. 감정을 멱살끌어 올리는 편은 아니라서, 내가  우물 뚜껑을 활짝 열고 빛이 한참 내리 쬐도록 그냥 그대로 둔다.


나는 어쩌면 꺼내줄 누군가 있다는 기대감과 믿음에 더욱 굴을 파고 숨어들어가는게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든다.


내가 누나에게 그런 존재이지 못한 것에 늘 미안하지만 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 난 천성이 막내인가 보다.




대책없이 퇴사를 했다.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지 않았냐며, 약간은 아쉬운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어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 버티는 데 승산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지도. 그저 지금의 선택이 늘 최선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대책없음과 방황이라는 합리화된 이유로 나는 나태함을 즐겼다.


덕분에,

더 많은 종류의 맥주와 와인을 알게 되었다.




무뎌진 자극 희미해진 시간 개념의 종착지는 잔고였다.

비어 가는 잔고는 저절로 제 정신이 들도록 했다. 누군가 먹고  만하니 잡생각에 빠지는 거라고 했던가. 어쩌면 그저 늘어지고 싶었던 반항기를 치료해준 것은 가족도 친구도 아닌 잔고였다.

 

두 발을 확 잡아채가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나는 구직활동에 (강제로) 앉혀졌다.

10월의 태풍마냥 할퀴듯 스쳐 지나간 두 번째 직장의 기억이 유난히 강렬하여, 다른 무엇보다 나의 안락함과 만족감에 집중하자며 구직을 했다.


생계와 관련된 일은 무엇이 되었든 만족스러울 순 없다.


직업과 회사를 선택할 때에도 만족도는 그저 돈이나 약간의 복지의 차이일 뿐이지 '무엇을, 어떻게'는 사실 내게 큰 결정요인이 아니었다.


결심은 거창하지 않았다. 짧은 문장이었다.

이다작가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는 내가 개인적으로 닳도록 읽는 여행 에세이 책인데, 담담하게 옆에서 이야기해주는 느낌에다 문장이 아주 인간적이라 자주 손이 간다. 작가 특유의 위트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한 번도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적은 없다. 다행히도 연애운은 없어도 일운은 많아, 취직도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했고, 그 이후로 일이 없어 고민한 적은 없다. (중략) 취미활동이 직업과 관련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가난에 대해 운을 띄우며 서술한 은 딱히 어떤 의미를 시사하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나에겐 꽤나 흥미로운 문장이었다. 취미활동이 직업과 관련이 있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시도는 해보자.

어차피 평생 일할 거, 조금이라도 즐거운 일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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