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한정 마케팅과 못돼먹은 리셀러를 향한 유치한 분노
이 백(bag)을 가져야 하는 핑계를 굳이 찾자면 주말부터 시작된 막둥이의 구내염이 아닐까.
유아들의 구내염은 성인들이 고기 대신 볼살을 씹어 생기는 염증, 피곤 또는 면역 저하로 발생하는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고열과 함께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린이집에 환아 한 명만 발생해도 눈치가 여간 보이는 게 아니고, 의사의 완치 확인서가 없으면 등원이 불가능한 몹쓸 전염병이다. 그러니 실내 키즈카페는 양심상 갈 수가 없고 하루는 놀이터, 하루는 바닷가 공원, 하루는 마트, 어떻게든 긴 하루를 보내본다. 게다가 구내염이라는 게 어른에게도 고통스러운데 만 2세 아기는 밥도 거부하고 물 한 모금 마시고도 온갖 짜증을 엄마에게 퍼붓는다.
다행히 막둥이의 고열은 하루 만에 끝을 봤지만 5일째 독박육아를 하려니 슬슬 멘털이 유리 조각.. 아니, 가을 낙엽 바스러지듯 흩날리는 것 같다.
난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한 INFJ 엄마인데 화장실까지 따라와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주며 변기 물 내리려고 스탠바이 하는 친절한 아들은 정말로 버겁다.
“아니, 엄마 아직 멀었다고... “
“많이 피곤하신 가봐요.”
12년째 우리 집에 오시는 정수기 이모님이 안쓰러운 듯 남기고 가신 한마디.
이 날 밤, 인스타그램 광고들은 한결같이 노골적으로 디자이너 백들을 선보였다.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은 팔로어들이 올린 피드에 내가 머물렀던 시간과 진심을 담아 누른 ‘좋아요’와 검색창에 드러냈던 나의 물욕들을 요리 재료 삼아 내 입맛에 딱 맞는 백들만 뽑아 한 상 차려냈다.
‘오늘은 사야겠다.
집에 백팩은 없잖아?
다가올 여름에 딱이지.
그동안 막둥이 보느라 고생했으니까.‘
그중에 눈에 가장 아른거리는 백을 골라 홈페이지를 들어갔더니 글쎄, 얘가 허니버터칩 마케팅을 하고 앉았네. 명품 샤넬도 아닌데 돈이 있다고,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가방이 아니었다. 각 디자인별로 프리오더(선주문) 날짜와 시간이 공지되면 누구보다 빠르게 주문 결제를 해야 하고 1-2개월 정도 후에나 받아볼 수 있단다. 역시 쉽게 얻기 힘든 백이라 더 탐이 나는군! 게다가 이 백의 프리오더 날짜는 내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딱 3일 뒤잖아? 이건 운명이다!
프리오더 오픈 5분 전으로 알람을 설정한다.
미리 회원가입과 배송지 등록은 기본.
품절 상태에서는 장바구니에 담기지 않기 때문에 위시리스트에 그 백을 담아둔다.
프리오더 5분 전 알람이 울리면 로그인부터 해둔다.
프리오더 개시! 서버폭주로 인터넷 속도가 엄청 느려지는데 뒤로 가거나 여러 번 터치하면 오류가 뜰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빠르게 품절된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여 드디어 백을 주문하게 되는데,
‘해당 상품은 품절입니다.’
라는 문구를 보기까지 딱 4분이 걸렸다.
나에게 이러지 마. 그 예쁜 백을 조건으로 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사람처럼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새것 같은 중고가 있지 않을까? 중고나라에 검색해 본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그때부터 프리오더에 성공한 리셀러들의 본격적인 재판매가 이루어진다. 30만 원대 가방에 딱 12만 원 프리미엄을 더 얹어서. 자기는 구매에 성공했는데 혹시 필요하시면 배송지 변경을 도와드리겠다며, 선주문 방식이니 받으시는 데는 한 달에서 두 달 걸리는 걸 감안하셔야 한다며.
으웩. 점심으로 시킨 자장면이 불어 터지든 말든, 참으로 오랜만에 입맛이 가심을 느꼈다. 첫눈에 반해 선망하던 가방을 얻는 데에 실패하자 배에서 스멀스멀 화가 일었다. 색상을 고민하며 밤잠 설친 날들이 허무해졌다. 터치 몇 번으로 목마른 소비자들의 돈을 가져가는 리셀러들과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브랜드 인지도와 희소성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니까 그러려니 하는 브랜드에 화가 났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를 도와준다고? 그 우주에 한국 독점권을 가진 서울야곡 아저씨가 없을 때의 얘기겠지. 그러니까 내가 누구든 그 여자를 얼마나 사랑하든 가질 수 없는 것은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참 진부한 스토리. 그렇게 해서 거의 두 달여 만에 나는 결국 그 기타를 포기했다. 내 성격이 비뚤어진 건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빈집을 찾아서 불이나 내고 도망가는 소심한 파혼남이 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없다고 해도 그 없는 남자의 심정만은 충분히 이해된다.
김연수 여행산문집, <언젠가, 아마도> 중 ‘천국에서 다시 만나 잘까, 내가 사랑한 그녀’ 중 옮겨 쓰다.
오늘도 나를 위로하는 건 때마침 읽고 있던 책이다.
간절히 원했던 기타를 얻지 못해 성격이 비뚤어졌다는데 웃음이 나왔다. 다행이다. 나만 실패한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다음 프리오더 날짜는 언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