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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영 Apr 25. 2023

‘쓰기‘를 좋아하세요?

‘쓰기’만으로 점철해 본 지난 기억들.


펜을 쥔다.

엄지와 검지는 손의 끝부분으로, 중지는 손가락의 옆면으로 펜 머리를 단단히 받친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살짝 말아 쥐어 손바닥과 함께 종이 바닥 위를 누르며 지나간다. 왼손도 거들어야 한다.종이가 솟아오르면 의도치 않은 선이 그어질 수도 있으니 왼손으로는 종이를 지그시 눌러 펜이 지나가기에 거스를 것 없게 만들어준다.


어릴 때부터 쓰는 것을 좋아했다. (글을 짓는 것이 아닌 단순히 적는다는 의미의 쓰는 것을 말하는 것)

내가 어릴 적 국민학교 1학년 시절에는 ‘쓰기’ 교과서가 따로 있었다. 우리말을 획순에 맞추어 바르게 쓰기 위해 칸이 질러져 있는 교과서였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교과서에 있는 칸에 쓰기 공부를 시키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셨는지 뒷면이 어른어른 비치는 기름종이를 덧대어 쓰기 숙제를 내주셨다. 한창 똥꼬가 발랄할 때라 친구들은 그 숙제를 가장 따분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어서 집에 가서 쓰기 숙제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기름종이는 교과서 크기보다 컸기 때문에 반듯하게 접어 잘라서 윗부분만 풀칠을 해 교과서에 붙여야 했다. 이 작업 또한 ‘쓰기‘를 위한 사전단계로써 이미 그때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희미하게 비치는 기름종이 위에 꼭꼭 눌러가며 쓰던 쓰기 숙제. 숙제를 다 하고 나서 기름종이를 살짝 들추면 교과서가 멀어지면서 뿌연 종이 위에는 바르고 고운 정자체로 쓴 내 글자만 남게 된다. 처음부터 혼자 힘으로 바르고 곱게 쓴 글씨인 양, 마법같은 순간이다. 그게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종이를 내렸다 올렸다 한참을 반복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쓰기 교과서는 물풀로 붙인 기름종이가 우글우글 울고 굳어서 다른 교과서보다 훨씬 두툼해지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 무한한 뿌듯함도 느꼈던 것 같다.

비록 오른손 중지에는 그때부터 굳은살이 박여 미운 손이 되었지만, 쓰기를 그렇게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연필을 쥐는 힘이 생겨 글자가 바르고 예뻤다.


국민학교 5학년 시절엔 매일 아침 담임선생님의 교무수첩을 들고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 대신 그날의 학사 일정을 매일 써오는 일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손도 못 대는 선생님의 검은색 가죽커버 교무수첩. 그 수첩을 팔에 끼고 복도를 지나 교무실에 들어서던 순간이 대단한 특권처럼 느껴졌다. 중학교 시절엔 교탁에서 선생님의 교사용 참고서를 꺼내 쉬는 시간에 미리 학습목표 따위를 칠판에 판서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선생님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 시절엔 학생회에 들어가 교내행사 현수막을 큰 붓으로 쓰기도 했었고, 아이 엄마가 된 후에는 문화센터 다니며 POP니, 캘리그래피 같은 자격증도 땄다. 혼자 쓴 일기장과 친구들과 나눈 우정장, 남자친구들에게 써 바친 러브장 따위를 모두 합치면 어마어마한 수가 될 거다.


요즘이라고 다르지 않다. 불혹을 갓 넘은 나이에 부끄럽지만 스티커와 마스킹테이프로 다이어리 꾸미기도 하고, 매일 새벽 불렛저널을 쓰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것만으로는 내 ‘쓰기 욕구’를 다 충족하기 못해 독서 한 뒤 노트필사도 하고 있다. 좋아하는 책의 구절, 다시 한번 꼭 보고 싶은 구절을 노트에 옮겨 쓴다. 눈으로는 책에 인쇄된 까만 글자들을 훑고 입으로 뱉으며 오른손으로 그대로 복사하듯 옮겨 쓴다. 글쓰기 실력을 높이는데 문장력 좋은 책을 필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은 후에는 그럴듯한 명분까지 생겼으니 더 신이 나서 쓰고 있다.

하지만 가끔씩 글자만 쓰는 기계처럼 눈과 손은 베껴쓰기만 하고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멀티태스킹 경지를 경험할 때도 있다. 이럴 때 보면, 목적을 가지고 필사를 한다기보다 그냥 뭐라도 손으로 ’ 쓰는 ‘ 그 동작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다 쓰고 난 그 결과물을 보며 만족하는 순간도 좋다.


 오늘은 하루종일 촉촉한 봄비가 내리는 날이다. 혼자 먹은 점심밥 냄새를 없애기 위해 우드윅 향초를 켰더니 향은 말할 것 없이 좋거니와, 나무 심지 타는 소리가 장작이 타는 듯한 ASMR을 들려준다. 가족들이 들이닥치기 전 조금 더 혼자 ‘쓰기’를 해야겠다.


요즘 배우고 있는 손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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