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영 May 11. 2023

나의 이름은



 마봉댁은 1943년 첫아들을 낳은 이후로 내리 딸 다섯을 낳았다.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이 여자가 시집을 가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라 여겨지던 때였다. 자궁 속에 들어앉은 작은 생명의 성염색체가 X인지 Y 인지는 열 달을 꼬박 품고 출산을 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무통천국도 없던 시절 생살을 찢는 출산의 고통 속에서도 기대와 실망을 다섯 번이나 느꼈을 마봉댁의 심정이란.

결국 마봉댁의 남편은 막내딸의 이름을 ‘말례(末禮)’라고 지었다. 딸은 이만하면 됐다는 의미의 종지부다. 순화, 향순, 순이(첫딸은 어릴 때 일찍 병으로 떠났다). 그 당시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여자 이름들을 딸들에게 지어주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에게는 온 집안의 염원이 깃든, 심오함마저 느껴지는 그 이름을 준 것이다.

먹처럼 새카맣고 풍성한 머리숱에 자매들 중 속눈썹이 가장 길고 제일 예뻤던 우리 엄마, 말례씨의 이야기다.


엄마는 예쁜 돌림자를 쓰는 언니들의 이름이 부러웠을 것이다. 어릴 적에는 왜 내 이름만 ’말례‘냐며 울고 보챘을지도 모른다.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사춘기 때에는 나라는 존재가 집안에 아들을 더 만들기 위한 역할로만 운명 지어진 것 같아 많이 울었을지도 모른다. (내 감수성이 우리 엄마를 닮은 거라면 안 봐도 뻔한 장면이다.)

아무튼 엄마가 말례가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외할머니는 엄마 밑으로 아들을 둘이나 더 낳으셨다.


이름을 바꾸는 것이 지금처럼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성인이 된 엄마는 스스로에게 ‘순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엄마의 설렘, 미소, 바람, 희망을 넣어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이름이겠지, 예쁘면서도 현실감까지 곁들여 말이다. 언니들처럼 돌림자를 넣어 “제 이름은 순영이에요.”라고 말할 때 그 누구도 순영을 의심하지 않아야 하니까.  


병원 대기실에서 호출되던 이름은 말례씨였던 엄마가 학교에 내는 가정통신문에는 순영이 새겨진 도장을 찍어주었다.

“엄마는 이름이 왜 두 개야?”

눈치가 있을 리 만무했던 나이에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엄마의 대답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괜히 엄마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 건 아닐까?


두 개의 이름을 쓰던 엄마는 어느 날인가부터 서서히 순영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이름에 연연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 김영삼 대통령 때 시행된 금융실명제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조진웅’이란 이름이 아버님 존함이시죠?”


평소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유퀴즈에서 유재석이 질문한다. 연예인들이 가명을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부모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조진웅 배우는 ‘평소에 아버지를 존경했고, 이름이 멋있고, 영화 크레디트에 아버지 이름이 올라가게 해드리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음주운전, 폭력시비, 마약복용까지.. 이번 사고는 누가 쳤는지 이름만 바꿔서 나오는 연예계 단골 뉴스다. 모르긴 몰라도 조진웅 배우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니 일을 하는 현장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사고 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누가 나를 나의 부모의 이름으로 부른다면 응답하는 말투나 행동에서부터 책임감을 느낄 테니까.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있던 차에 브런치에 쓸 활동명을 엄마의 잊혀진 두 번째 이름 ‘순영’으로 결정했다. 새로운 시작을 하고팠던 엄마의 설렘, 미소, 바람, 희망을 닮고 싶어서다.

왜 엄마의 본명인 ‘말례’로 활동하지 않냐고?





음....


글쎄,

아무리 그래도 말례는 나도 좀.....





늦은 밤 손글씨를 쓰며 나의 두번째 이름을 고민하던 때







작가의 이전글 제주도와 타이레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