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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영 May 05. 2023

제주도와 타이레놀

여행의 이유들


내 머리가 돌도 아닌데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내 뒷머리에 정을 대고 마구 두드리는 것 같다.

제주도까지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때에 도대체 이 두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오늘 하루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식구들을 조금이라도 더 재우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일어나 혼자 준비하고 미리 꾸려놓은 짐을 한 번 더 점검한 후 집안 곳곳을 단속했다. 쪼꼬, 캔디의 3박 4일 치 사료와 물은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하려고 남편을 설득하고 등을 떠밀어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겨우 김해에서 제주까지 한 시간 거리의 비행이지만 35개월 폭주기관차 아들을 동행한 나에게는 억겁의 시간 같았다. 아이가 조금만 목소리가 커져도, 앞 좌석 등받이에 붙어있는 접이식 책상을 펼쳤다 접었다 할 때도 다른 승객에게 피해가 갈까 봐 조마조마했다. 무사히 제주에 도착해서도 혼자 짜온 여행일정에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는 나는 여행가이드가 되어 일정을 진행했다. 알게 모르게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나 보다.

두통을 일으키는 스트레스를 물컵에 비유하자면 그때까진 찰랑찰랑 괜찮았다.


방지턱을 덜컹하고 넘는 순간 뒷자리에서 딸아이의 작은 비명이 들렸다.

“뭐야? 왜 그래?”

“물이 쏟아졌어.”

생수통을 뚜껑을 연 채로 무릎 사이에 끼워놓고 핸드폰을 보다가 방지턱을 넘는 작은 충격에 물이 콸콸 쏟아져 한쪽 운동화가 그대로 젖었단다.

스트레스 한 방울 추가.


숙소 가는 길에 아름다운 금능해변에 마음을 빼앗겨 그대로 주차를 하고 백사장으로 내려갔다.

“옷 안 젖게 조심해!”

파도 없는 얕은 바닷물에 들어가 고동, 소라게를 잡느라 정신이 팔린 아이들에게 ‘옷 버리지 않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스트레스 한 방울 또 추가.


결국 내 스트레스 한도는 초과되어 그때부터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타이레놀 두 알을 털어 넣고도 한 참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지금 처한 현실이 너무나 고되어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일상을 잠시 벗어나는 여행은 일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진통제같은 역할을 한다.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 보면 내가 느꼈던 고통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있기도 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멀리서 보면 그 속에서 아등바등 댈 때 보이지 않던 해결방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남들은 팍팍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떠나기도 하고 열심히 살아낸 스스로에게 보상을 하듯 여행을 떠난다는데, 이 좋은 여행을 와서까지 뭐가 그리 완벽해야 하는지 나는 내 성질에 못이겨 진통제나 털어 넣고 있다니 한심하다, 한심해.







나의 여행은 사실 관광이 대부분이다. 곧 만 3세가 되는 꼬맹이부터 학교를 째고 나와 신이 난 잼민이(?) 딸 둘까지 함께 하는 여정이라 여행은 늘 관광이 된다.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더 놀게 해주고 싶은 욕심쟁이 엄마의 계획이 늘 그렇게 만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나를 찾고자 하는 찰나를 느끼고 싶어 여행을 갈 때는 늘 책을 가져가고 있다. 이번 여행에는 <제주, 소요>라는 책을 가져갔다. 여유 없는 관광을 하는 나에게 제주로 이제 막 이주하여 느긋하게 진짜 제주를 느끼는 작가의 사진과 글이 부럽기만 하다. 조금이라도 책에 공감하고 싶어서 여행 일정 중 혼자 새벽시간에 책을 펼쳤다. 아직 남편과 아이들이 잠에서 깨지 않은 고요한 시간, 드립백 커피에 견과를 챙겨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그 시간이 좋았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잠에서 깬 막둥이의 작은 발걸음 소리는 내 시간을 방해하는 사랑스러운 침입자.



책 덕분에 3박 4일의 짧고 정신없는 일정 중에서도 잠시 여유를 가지고 여행하는 맛을 느끼게 해 준 책에 감사했다.

잠깐의 여행이 아닌 아예 ‘이주’를 결심하고 행한 것 보면 멍멍이의 부재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작가에게 꽤 깊은 상실을 주었나 보다. 마음이 힘들고 공허할 때 찾은 아름다운 섬 제주는 그녀에게 안식을 주고 위안을 주고 있는 듯하니 다행이다.

제주로의 이주 생활이 작가에게 일시적 효과인 진통제를 넘어서, 본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명약이 되기를 감히 바라본다.



당신은 어떤 이유로 여행을 하는가.


새벽 5시 30분경, 제주 숙소에서 잠시 여유 부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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