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들
내 머리가 돌도 아닌데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내 뒷머리에 정을 대고 마구 두드리는 것 같다.
제주도까지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때에 도대체 이 두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오늘 하루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식구들을 조금이라도 더 재우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일어나 혼자 준비하고 미리 꾸려놓은 짐을 한 번 더 점검한 후 집안 곳곳을 단속했다. 쪼꼬, 캔디의 3박 4일 치 사료와 물은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하려고 남편을 설득하고 등을 떠밀어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겨우 김해에서 제주까지 한 시간 거리의 비행이지만 35개월 폭주기관차 아들을 동행한 나에게는 억겁의 시간 같았다. 아이가 조금만 목소리가 커져도, 앞 좌석 등받이에 붙어있는 접이식 책상을 펼쳤다 접었다 할 때도 다른 승객에게 피해가 갈까 봐 조마조마했다. 무사히 제주에 도착해서도 혼자 짜온 여행일정에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는 나는 여행가이드가 되어 일정을 진행했다. 알게 모르게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나 보다.
두통을 일으키는 스트레스를 물컵에 비유하자면 그때까진 찰랑찰랑 괜찮았다.
방지턱을 덜컹하고 넘는 순간 뒷자리에서 딸아이의 작은 비명이 들렸다.
“뭐야? 왜 그래?”
“물이 쏟아졌어.”
생수통을 뚜껑을 연 채로 무릎 사이에 끼워놓고 핸드폰을 보다가 방지턱을 넘는 작은 충격에 물이 콸콸 쏟아져 한쪽 운동화가 그대로 젖었단다.
스트레스 한 방울 추가.
숙소 가는 길에 아름다운 금능해변에 마음을 빼앗겨 그대로 주차를 하고 백사장으로 내려갔다.
“옷 안 젖게 조심해!”
파도 없는 얕은 바닷물에 들어가 고동, 소라게를 잡느라 정신이 팔린 아이들에게 ‘옷 버리지 않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스트레스 한 방울 또 추가.
결국 내 스트레스 한도는 초과되어 그때부터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타이레놀 두 알을 털어 넣고도 한 참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지금 처한 현실이 너무나 고되어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일상을 잠시 벗어나는 여행은 일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진통제같은 역할을 한다.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 보면 내가 느꼈던 고통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있기도 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멀리서 보면 그 속에서 아등바등 댈 때 보이지 않던 해결방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남들은 팍팍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떠나기도 하고 열심히 살아낸 스스로에게 보상을 하듯 여행을 떠난다는데, 이 좋은 여행을 와서까지 뭐가 그리 완벽해야 하는지 나는 내 성질에 못이겨 진통제나 털어 넣고 있다니 한심하다, 한심해.
나의 여행은 사실 관광이 대부분이다. 곧 만 3세가 되는 꼬맹이부터 학교를 째고 나와 신이 난 잼민이(?) 딸 둘까지 함께 하는 여정이라 여행은 늘 관광이 된다.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더 놀게 해주고 싶은 욕심쟁이 엄마의 계획이 늘 그렇게 만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나를 찾고자 하는 찰나를 느끼고 싶어 여행을 갈 때는 늘 책을 가져가고 있다. 이번 여행에는 <제주, 소요>라는 책을 가져갔다. 여유 없는 관광을 하는 나에게 제주로 이제 막 이주하여 느긋하게 진짜 제주를 느끼는 작가의 사진과 글이 부럽기만 하다. 조금이라도 책에 공감하고 싶어서 여행 일정 중 혼자 새벽시간에 책을 펼쳤다. 아직 남편과 아이들이 잠에서 깨지 않은 고요한 시간, 드립백 커피에 견과를 챙겨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그 시간이 좋았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잠에서 깬 막둥이의 작은 발걸음 소리는 내 시간을 방해하는 사랑스러운 침입자.
책 덕분에 3박 4일의 짧고 정신없는 일정 중에서도 잠시 여유를 가지고 여행하는 맛을 느끼게 해 준 책에 감사했다.
잠깐의 여행이 아닌 아예 ‘이주’를 결심하고 행한 것 보면 멍멍이의 부재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작가에게 꽤 깊은 상실을 주었나 보다. 마음이 힘들고 공허할 때 찾은 아름다운 섬 제주는 그녀에게 안식을 주고 위안을 주고 있는 듯하니 다행이다.
제주로의 이주 생활이 작가에게 일시적 효과인 진통제를 넘어서, 본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명약이 되기를 감히 바라본다.
당신은 어떤 이유로 여행을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