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30분경. 스페인의 한 시골마을 게르니카의 평화로운 장날이었다. 남자들이 전쟁에 나간 사이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이 남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때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낮익지 않은 외관의 비행기 몇 대가 지나갔다. 사람들 사이로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이 무너지고 잔해와 연개 사이로 사람들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숨고, 달렸다. 이들을 샅샅이 찾아내듯, 하늘에서는 몇 번이고 폭탄이 쏟아냈다.
하늘을 가로지르던 비행기는 히틀러 공군이 동원한 43대의 전투기였다. 폭격을 위해 폭탄 50,000발이 사용되었다. 폭격의 목적은 ‘비행기 성능과 조직 효율성 시험’ 이었다. 게르니카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었다. 1654명이 사망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1937년 초 스페인 정부로부터 그림을 의뢰받았다. 그는 차일피일 작품 제작을 미루고 있었다. 그에게 조국에서 벌어진 게르니카 학살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기존의 구상을 내던지고, 그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그려냈다. 이것이 바로 훗날 전쟁과 평화의 예술적 표현으로서 가장 잘 알려질 그림, 그리고 사건 자체보다 그림으로 더 유명해질 작품인 <게르니카>다.
우리는 <게르니카>라는 작품의 제목과, 잘 알려진 피카소의 일화를 통해 이 그림 속의 세부적인 요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작품을 놓고 보았을 때는 전쟁과 폭격을 연상시킬만 한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을 뿐이다.
추상화로 이행하는 입체파 작가로서, 피카소는 구체적인 전쟁 묘사를 생략했다. 따라서 <게르니카>에는 나치에 의한 직접적인 폭격의 모습이나, 폭탄이 등장하지 않는다. 피카소는 게르니카 폭격이라는 사건의 재현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다만 폭력의 직접적인 묘사 없이, 즉 전쟁과 폭격의 묘사 없이 인간성을 짓밟는 폭력의 잔인함을 표현했다. <게르니카>는 ‘전쟁’보다 혼란과 죽음, 절망의 혼재를 보여준다.
<게르니카>속 사람들은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가
이제 <게르니카>를 천천히 들여다보자. 작품의 조형적 요소들에서 우리는 게르니카의 진정한 작품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게르니카>의 ‘비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폭력의 단서는, 바로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성이다.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고 절규하는 여성은 <게르니카>를 보는 이들이 작품의 비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단서이다. 가장 어리고 약한 존재인 아기의 죽음을 통해 <게르니카>는 폭력 앞의 희생에 대한 부당함을 강조한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 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하늘에서 떨어진 폭발물을 연상시키면서 마치 절망 앞에서 하늘에 비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손에서 부러진 칼을 놓지 않는 군인은 인간의 저항의식을 보여준다. 그를 짓밟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한 형태로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일그러진 형태들 아래로 깔려있는 군인을 통해, 저항하려는 인간의 모습도 무참히 밟아버리는 폭력의 야만성은 극대화된다. <게르니카>는 전쟁이 민간인 뿐만 아니라 참전 군인들에게도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그들의 살고자 하는 저항의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뾰족한 세모 모양의 형체가 사람과 집을 집어삼킬 듯 감싸고 있다. 이는 날카로운 이빨처럼 모든 걸 집어삼키는 불의 형상과 같다. 게르니카에서 자행된 폭격은 마을 자체를 초토화시켰다. 사람들의 삶의 터전, 평범한 삶의 행복의 배경은 잠깐의 폭력 앞에 무너졌다.
불길에 휩싸인 집 옆,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그녀의 한 쪽 다리는 다른 인물들과 비교했을 떄 기괴하고 부자연스럽다. 비대하게 그려진 왜곡된 다리는 그녀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녀의 표정은 넋이 나가 있고, 다리는 화면 끝으로 쏠려 있는데, 바로 위 불길에 휩싸이는 여성의 모습과 함께 폭력의 현장으로 다시 휩쓸려 들어가는 상황을 연출한다. 결국 전쟁과 폭력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생명과 삶의 터전을 빨아들이며 파괴하는 폭력 안에서, 우리는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
지금까지 <게르니카> 안의 다양한 모습의 고통받는 인간을 살펴보았다.그런데 <게르니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작품에 인간만 그려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게르니카>에는 왜 동물이 그려져 있을까?
<게르니카> 속 말과 황소
혼란스럽게 뒤엉킨 현장에서 말이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고 있다. 절박하게 벌려진 입 안으로 보이는 뾰쪽한 혀는 고통으로 인한 절규와 위태로움을 극대화한다. 주변의 사람들과 같은 절망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말은 희생된 사람들과 같은 처지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피카소가 그린 초기 습작에서는 말이 지금보다 격정적인 몸부림을 치며 목이 위로 향해 있다. 또한 피카소는 공개적으로 말이 고통받는 스페인 민중을 나타낸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폭력 앞에 희생된 민중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고 말을 그 현장에 함께 배치했다.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있는 말의 의미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게르니카> 속 황소의 모습은 다양한 의미로서 해석된다. 사실 황소는 피카소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한다. 피카소는 이전부터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소재로 자주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이 신화 속 괴물을 파괴적이면서도 유혹하는 주체, 영웅의 모습 등 다양한 상징을 혼합하여 그려냈다.
우리가 <게르니카>에 그려진 황소를 보고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황소가 고통의 현장 속에서 혼자 몸부림치지 않고 있기 떄문이다. 고개를 쳐들고 절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앞을 멍하니 쳐다보는 황소의 모습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황소의 모습이 폭력의 잔악함과 나치 파시즘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이 글에서는 독자의 판단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게르니카>의 황소는 스페인을 파괴하는 히틀러와 나치정권으로 해석된다. 한편 당시 피카소는 나치 치하의 민휀에서 전시를 했다. 이를 고려한다면 나치 파시즘의 예술규칙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요소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피카소가 그려내는 황소와 미노타우르스는 그 자체로 다양한 의미를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하나의 정형화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다면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와 달리 황소를 새로운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황소와 나치, 파시즘, 미노타우르스- 이러한 키워드를 애써 엮지 않아도, 스페인과 황소의 연결점은 투우를 떠오르게 한다. 스페인 하면 붉은 천으로 뛰어드는 황소가 떠오르듯이, 황소 자체는 스페인 민중에게 친근한 동물이다. 황소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다양한 감정을 캐낼 수 있다. 누군가에게 황소의 표정은 기괴함보다 일종의 연민일 수 있다. 그렇다면 황소는 잔혹한 폭력의 상징보다는 스페인 민중을 보듬고 구원할 스페인 정부를 상징하는 존재일 가능성 또한 있다. 단순히 황소를 스페인 민중의 적, 나치 파시즘으로만 규정하기는 정형화된 결론일 수 있다. 다양한 해석들은 작품과 이를 감상하는 자신과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방식이다. 어쩌면 이것이 예술을 내면화하는 진정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폭력을 멈추는 방법
다양한 인간의 모습과 동물을 통해 <게르니카>는 폭력의 잔혹함과 부당함을 고발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폭력을 비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피카소는 폭력에 분노하면서도, 폭력을 멈출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다.
화면 중앙의 위,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촛불이 들려 있다. 한 여성이 하늘로 뻗은 손에 쥐어진 촛불. 이는 폭력의 상징과는 멀어보인다. 상징과 추상으로 가득한 <게르니카>에서 촛불은 무엇을 의미할까.
서양미술에서 촛불이란 구세주, 즉 예수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빛이다. 참혹한 현장에서 촛불을 뻗어 드는 모습은 -종교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대한 절박한 외침같기도 하다. 이러한 촛불은 고통스러운 현장 속에서 인간이 갈망하는 존엄성과 인류애, 평화라는 ‘구원’으로 표상된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이들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의 구원을 바라는 성모 마리아. 즉 촛불을 든 여성은 폭력에서 벗어나 인간의 구원을 바라는 마리아의 이미지로도 해석된다.
촛불이 예수를 상징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 또한 떠올릴 수 있다. ‘원수조차도 사랑하라’. 예수는 개인의 차이를 넘어선 인류애를 이야기했다. 이는 <게르니카>의 가장 중요하고 최종적인 메시지, 화해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폭력은 분노와 절망을 낳는다. <게르니카> 또한 이에 동의하면서 전쟁과 인간의 잔혹한 폭력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피카소는 진실된 폭력의 종결을 요구한다. 전쟁이 끝나고 폭력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단순히 전쟁을 막고 무기를 내려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응징이나 또 다른 폭력이 아닌, 하늘을 향해 높이 든 촛불, 즉 근원적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다.
피카소는 고통 앞에서 인간 존엄이라는 공통의 가치를 존중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서로의 다름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 ‘공통의 인간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 이것이 <게르니카>의 또 다른 핵심이다.
<참고문헌>
홍창호,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에 나타난 추상적 표현과 상징의 휴머니즘 해석」, 『미술교육연구논총』제59호, 2019, 171-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