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은 월간평가이후 자리를 등수대로 앉히셨던 기억이 난다.(선생님의 그 방법에 대한 교육적인 시시비비는 여기선 따지지 않으려 한다.) 창가쪽 1분단 앞줄에 1등부터 쭉 앉히시고 마지막 4분단에는 등수의 후반주자들, 꼴찌들을 앉히셨다. 항상 1분단 맨앞줄에 앉아 있었던 나는 으레 그 자리가 당연한 나의 자리였었다. 굳이 자리대로 앉히지 않아도 반에서 누가 1등이고 꼴찌인지 우리들끼리는 알고 있어서 그랬을까. 4분단의 아이들이 의외로 기가 죽거나 부끄러워했던 기억은 없다. 이것도 철저히 나의 기억이라 그들의 진짜 속마음은 내가 몰랐을 수도 있고 쪽팔림을 애써 숨기려 태연한 척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의 1분단 앞줄자리가 1분단 뒤쪽으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았던 건 고등학교 때쯤이었다. 성적이 예전처럼 나오지 않아 참 속상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 나의 직업이 그렇게 선망의 직업도 아니고 내 월급이 친구들보다 많은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자리는 2분단쯤으로 밀려났을까 아니 3분단이었을까
그리고 내가 4분단 맨 끝에 앉아 있다고 느꼈던, 내 인생에서 가장 꼴찌가 되는 순간을 맛보았던 건 바로 결혼이었다. 내 친구들 중 가장 늦게 결혼을 했고 노산모가 많은 이 시절에서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산모를 만나보지 못했으니 결혼과 출산에서 꼴찌 자리는 확실했다. 43살에 결혼을 했으니 비혼과 미혼과 노처녀, 노총각이 많은 시절이라고 해도 우려낼 대로 우려낸 진짜 노처녀였고, 45살에 아이를 낳았으니 그냥 노산도 아닌 초울트라노산이었던 것이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다 보니 늦었다는게, 나이가 많은 엄마라는게 그렇게 큰 장점도 단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라는 점과 그래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된다는 점에서는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 모두는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게 아닐까.
남들 재혼할 나이에 결혼한 우리 부부지만 신혼초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지 못해 참 많은 부딪힘이 있었다.
성격, 기질, 가치관 등 모든 부분에서 상반되는게 많았던 우리 부부는 심지어 온도궁합도 맞지 않았다.
퀸 사이즈의 넓은 침대였지만 코도 골고 몸부림도 심한, 허벅지 굵은 이 남자와 같이 자는 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여름에 남편은 에어컨을 왕창 틀어놔야만 했고 난 추워서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자야만 했다.
온도궁합만큼 맞추기 힘들었던 건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의 언어, 남자의 언어였다. 서로가 굳이 큰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오해가 큰 싸움으로 번진적도 몇 번 있었다.
우리에게 와 준 것만으로도 건강하게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느꼈던 내 아이를 키우는 일도 나이가 많다고 그리 잘 해내는 일은 아니었다. 목욕을 다 시킨 후 밥을 먹는 내 아이가 밥과 국으로 식탁과 의자와 자기 몸을 범벅으로 만드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크게 두 가지를 깨달았다. 내 성질이 참 더럽다는 것과 목욕은 꼭 밥을 먹이고 시켜야 된다는 것을!
다시 내 인생의 1분단, 2분단, 3분단, 4분단의 시절들을 돌아보면
분단의 앞에 있다고또는 뒤에 있다는 그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그닥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행복하고 감사한 시기는 오히려 4분단으로 시작한 나의 결혼과 육아 시기인 지금이다.
나이가 많아서 좋은 점은 인생에서 살짝 힘 빼는 법을 배웠다는 것일 테고 작은 것일지라도 일상의 소소함에감사함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이다.
분리수거를 척척해주는 허벅지 굵은 내 남자가 있어서, 어느덧 3살이라고 자기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밥을 척척 먹는 내 아이가 있어서 그 존재만으로도 참행복을 느낀다.
인생에 있어서 좀 늦었다는게 뭐가 그리 중요하며 내 순서가 앞이 아니라 뒤라는게 또 뭐가 그리 중요할까.
내 마음으로 나의 작은 행복도 놓치지 않고 누릴 수 있으면 그 사람이 1분단 맨 앞 자리에 앉아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때 어떤 어려운 문제보다, 출제율이 높았던 단골 기출문제보다 내가 좋아했던 문제가 하나 있다.
잘려있지 않은 동그랗고 큰 피자를 6명이 똑같이 나눠 먹는 방법은? (단 일체의 도구사용불가)
정답은 가위바위보로 먹을 순서를 정한 뒤, 피자 자를 권리를 맨 마지막 6등, 꼴찌에게 주는 것이다. 그 꼴찌는 가장 마지막에 피자를 선택해야 하므로 정확한 6등분을 만들기 위해 일생일대의 노력과 능력을 발휘해 피자를 자를 것이다.
난 어쩌면 인생에서, 꼴찌로 피자를 선택해야 했던 그 아이마냥 꼴찌로 결혼을 하고 꼴찌로 출산을 한 것일 테다. 그래도 피자 자를 선택권이 꼴찌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밑지는 장사는 아닐터. 해볼만한 장사다.
다행히 내 인생의 모든 선택권과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나의 노력으로 나의 마음으로 충분히 1등과 같은 크기의 피자를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이젠 충분히 그행복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