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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티처 10시간전

술 마시고 반성문을 썼습니다

폭주하는 이십 대

내 별명은 술또

술또의 뜻은 느낌 그대로다. 술만 마시면 돌+아이가 되는 것이다. 나는 20대 때 술을 미친 듯이 즐겨마셨다. 항상 술을 이기려 했고, 술 한잔에 희로애락을 녹여 절제하지 못하고 다음 장면으로 이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술을 찾았고, 술과 함께 하지 않는 하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화룡점정을 하지 못한 기분이랄까? 거의 반주홀릭에 빠져 밥 먹을 때마다 술을 찾았다.



인생 최고로 두들겨 맞은 날

친구들과 재밌게 노는 바람에 핸드폰이 내 손에 있다는 걸 까먹었다. 호랑이(원주언니)한테 부재중 전화가 10통 넘게 와있었고, 카톡과 문자 전부 다 현실 부정하듯이 그날 스위치를 끄고 놀았다. 통금시간이 넘어서야 나는 집에 들어갔다. 내 기분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자랄까? 그 정도로 만취였고, 집에 무시무시한 호랑이언니 한 명이 살고 있다는 걸 까먹을 정도였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자꾸 다른 곳을 눌렀고 계속 틀려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렸다.

삐이이이----잉잉잉

경고음이 지나길 기다리며 다시 비밀번호를 눌렀다. 드디어 나는 집에 들어왔다. 거실에서 누가 나를 죽일 듯이 째려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분위기를 살피려던 찰나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한테 달려오는데ㅔㅔㅔㅔㅔㅔ

아아아ㅏㅏ아악아악아ㅏ아ㅏㅇㄱ
언니 잠깐ㅏㅏㅏ마아아 안아ㅏㅏ아악

너무 무서워서 잽싸게 도망가다가 내가 내 발에 걸려 넘어졌고, 그렇게 잡혀 등짝을 세게 여러 번 맞았다. 그 순간 내 몸 안에 있던 장기들이 밖으로 튀어나온 줄 알고 입을 막았다. 식도부터 위, 심장, 폐, 갈비뼈,,, 심지어 내부에 있는 공기들까지 울려 내면의 진동이 느껴졌고,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안 아파 힣ㅎㅎㅎ안 아팡헿ㅎㅎㅎㅎ

이 와중에 자존심 세운다고 안 아픈 척하다가 호랑이의 두 발로 나는 잔혹하게 밟혔다. 그렇게 더 이상 대들지도 못하고 울다가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보글보글 익숙한 냄새다.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다. 어서 일어나라는 따뜻한 호랑이언니 목소리와 아침마다 반겨주는 강아지(보리)가 나를 깨웠다. 꼬질꼬질한 상태로 밥상에 앉아 김치찌개 한 스푼 뜨며 어젯밤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호랑이언니의 눈치를 슬쩍 봤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따뜻하게 대해준다. 나는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다가 퍼즐들이 점점 맞춰졌고 자연스럽게 호랑이언니한테 잘못했다고 빌었다. 밥 다 먹고 이야기하자는 말에 식도가 턱턱 막혔다. 목메는 걸 알고 물을 떠주는 호랑이언니의 사랑이 느껴지면서 나는 내 잘못에 대해 변명하지 않게 됐다.


호랑이언니는 진짜 화가 났을 때 흥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차분하고 말로 조곤조곤 울리며 팬다. 그리고 잘못했는데 변명하는 순간 침묵과 함께 공포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걸 알아서 빠른 인정으로 빠져나가야 한다.(정말 많이 혼나본 자) 언니의 독설이 시작됐다. 나는 땅을 쳐다보며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독설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후..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벌은 A4용지 한 장 반성문이다.



퇴근하고 올 때까지 써서 책상에 둬

쳇. 나이가 몇 살인데 반성문이야.. 처음 써보는 반성문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구글에 검색했다. [반성문 쓰는 법], [술 마시고 반성문] 대충 문구 몇 개 따서 적고 어젯밤 일기로 채우다가 편지 쓰다가 A4 한 장을 완벽히 채웠다.


호랑이언니가 퇴근하고 왔다. 반성문 한 장이 책상에 올려진 걸 보고 기특하단 표정을 지으며 앉아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뭘 잘못했는지 잘 적혀있어 쓰느라 고생했다고 나를 다독여줬다. 그리고 다음에는 반성문 두 장이라고 경고하며 자매의 우애는 돈독해지며 마무리했다.




장,



더 썼다.


(과거 20대 때의 이야기이고, 현재는 그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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