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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서 Jul 12. 2023

2. 으라차차 부산여행기 (上)

그런데 이제 공황장애를 곁들인





나는 야구를 잘 모른다. 친구들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응원하는 팀을 함께 응원하며 자연스럽게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경우가 많은데, 우리집은 일단 야구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아빠는 야구를 좋아했지만 한국리그에는 영 흥미가 없었고 메이저리그를 무지하게 좋아했다. 스포츠는 응원하는 팀이 없으면 빠져들기 어렵다.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야구를 '좋아하고 싶었'지만 좋아하지 못했다. 야구장에 가면 재밌다는 이야기만 전해듣고 부러워할 뿐이었다.


웬 난데없는 야구 이야긴가 하면.


이번 부산 여행은 오로지 '야구 직관'을 위해 꾸려졌기 때문이다. 본가가 부산에 있고,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 A가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긴 게 계기였다.



친구B가 마침 여행을 가고 싶던 참이라며 합류 의사를 보였고, 나도 여행을 가고 싶었기에 콜했다. 야구장이 어떤 곳인지 친구들과 함께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하여 얼렁뚱땅 2박3일 부산 여행기가 시작된다....



K가 선믈해준 카타리나 반지와 카리나 인형과 함께.










부산여행 1일차:

하늘엔 구멍이 뚫렸는데 나는 충전기가 없고....






공황, 여행의 동반자

MBTI.... 재미있는 콘텐츠 정도로 가볍게 즐깁니다.⁽̨̡ ¨̮ ⁾̧̢


잠깐 유행하다가 말 줄 알았던 MBTI 성격유형검사는 생각보다 인기를 길게 유지하고 있다. MBTI 유형 중 'J'가 나오냐 'P'가 나오냐에 따라 편의상 '계획형'과 '즉흥형'이라고 부르는데, 이 기준에서 나는 엄청나게 즉흥적인 편이다.


'J들은 여행 갈 때 엑셀이랑 ppt로 계획표를 짠대.'


나는 이 말이 즉흥형 인간들 사이에서 도는 도시괴담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내 가까이에도 실제로 엑셀과 ppt로 여행 계획을 세우는 친구들이 있었다. 오, 실화였군.


반면 나는 계획형 입장에서 도시괴담 같은 존재다. 내가 여행을 가기 전에 준비하는 건 단 두 가지다. 이동편과 숙소 예약. 두 가지만 해결되면 나머지는 그날 그 시간의 기분에 따라 즉석에서 결정한다. 이번 부산여행에서도 당연히 나는 KTX 표와 숙소만 예약해두고 아~무런 생각 없이 기차에 올라탔다. 도착하면 어디 가서 뭘 먹지. 이 고민까지 여행의 일부다. 슬슬 검색해본 뒤 숙소 근처에서 국밥을 먹기로 했다.


참고로 나는 공황장애가 있는데, 나의 공황발작은 멎지 않는 구토로 귀결된다. 최근에는 많이 나아져 공황발작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외출 시에 숨이 차고 배가 아파오는 등 소소한 증상이 함께한다. 애증의 동반자다.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증(憎)에, 그치만 내가 바란다고 짠 없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난 애(愛)가 조금 섞여 있다. 공황장애는 이를테면 이 거지 같은 삶이란 섬을 같이 헤쳐 나가는 전우다.



이번 여행에도 공황은 함께였다. 수시로 약을 챙겨 먹으며 열심히 쏘다니다 보면 체력이 뚝뚝 깎였다. 기차에서 내려 퀭한 눈으로 택시를 타고 국밥 집으로 향했다. 택시에 탑승하는 동시에 어느 모로 보나 관광객이 분명한 인간을 향한 기사님의 호구조사가 시작됐다. 사람이 많은 기차를 타고 아직 익숙지 않은 장소에 온 탓에 긴장도가 다소 높아진 상태여서 택시 기사님과의 스몰 토크가 살짝 부담스러웠으나,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혼자 왔냐, 혼자 여행하면 심심하지 않냐, 뭘 할 거냐 의례적인 질문을 던지던 기사님이 내가 '친구와 함께 사직구장에서 야구를 볼 것'이라고 답하자마자 반색하며 롯데의 역사와 상징성에 대해 줄줄 이야기했다.


"부산 사람들한테 롯데는 엄청난 자랑이에요."


나는 광명시와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나 고향에 대한 애착을 느껴본 적 없다. 기사님의 말에서 묻어나는 고향에 대한 커다란 애정이 몹시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 역시 여행의 묘미다.


국밥집에 도착했을 때는 두 시가 넘었다. 내가 방문한 곳은 관광객이 줄을 서서 먹는다는 맛집이었는데, 본점이 아닌 분점이라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아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나는 음식 맛에 평이 박하기도 박하지 않기도 하다. 내 별점 기준은 0점(불쾌) 3점(무난) 5점(감동)으로 나뉘는데, 거의 정상분포를 이룬다. 감동 받는 경우도 적지만 불쾌하다고 느끼는 일도 적다. 웬만하면 무난하게 맛있다고 느끼는 편. 점심에 방문한 국밥집은 무난하게 맛있었다. 밥 한 공길 다 먹진 못했지만 국밥 안에 들어있는 부속물을 야무지게 다 챙겨먹었다.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밖을 나왔다. 여전히 비가 죽죽 쏟아지고 있었다.








애플워치 충전기가 없어서 백화점에 갔는데

백화점에서 애플워치 충전기를 안 팔아서 가방을 사다

 ㄴ 이게 뭔 소리임?


백화점.... 신기한 곳. 저는 MBTI에 진심이 아니어서 패스하고 옆에 있는 인형뽑기에 5000원... 날렸다네요.



숙소 입구를 한참동안 헤매다가 겨우 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니 좀 살 것 같았다. 숙소는 급하게 구한 것 치고 비용 대비 매우 만족스러웠다. 내가 여행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숙소다. 체력 가성비가 떨어져서 효율적으로 충전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짐가방을 내려놓고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잠깐 숨을 돌렸다.


비가 정말.... 많이 왔다....


이때부터 나가기 싫다는 욕구가 엄청나게 커졌다. 평소에 바다를 볼 기회가 없으니 바다를 꼭 보려고 했는데, 비가 정말로 너무 심하게 내렸다.... 기차에서 대략 세운 계획을 전부 엎기로 한다. 일단은 나가서 애플워치 충전기를 사오기로 했다.


Q. 애플워치 충전기를 왜 부산 가서 사나요?

A. 그러게요....


짐싸기도 미루고 미루다가 여행 당일 아침에서야 부랴부랴 가방을 챙겼는데, 도대체 애플워치 충전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리 집안을 뒤져도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집에서는 애플워치, 핸드폰, 이어폰을 동시에 충전할 수 있는 3 in 1 충전기를 사용하는데 이걸 가져가자니 너무 무거울 것 같았다. 그래서 안 챙겼다. 그냥 가서 사지 뭐! 하고 나왔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어쨌든, 눈앞의 미래는 모른 채, 갓 숙소에 도착한 당시의 나는 애플워치 충전기를 구하러 나섰다. 몇 분 안 되는 거리에 백화점과 애플 리셀러 매장이 있어 충전기가 내 손에 금방 들어올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의기양양하게 판매점에 들어가서 얻은 것은 "지금 충전기 재고가 없네요."라는 기대에 완전히 어긋난 대답뿐이었다.


하하. 퍼니 낫 퍼니.


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백화점 전자기기 매장에 들르기로 했다. 그리고 무슨 우연인지(우연 아님) 나에게는 졸업 선물로 받은 백화점 상품권이 있었는데, 여행 중 들고 다닐 만한 적절한 가방이 사고 싶어져 백화점도 구경하기로 마음 먹었다.


문제는 내가 온라인으로 쇼핑할 때도 상품페이지를 1부터 10까지 모조리 싹 다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류의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격이다. 가전 매장은 9층과 10층이었는데 가방을 구경하겠다는 일념으로 지하 2층부터 10층까지 싹 돌았다. 심지어는 백화점에 마땅히 원하는 물건이 없어서 백화점과 연결된 쇼핑몰로 넘어가 또 4층 정도를 싸악 훑어봤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하는 의문이 들고 숨이 차올랐지만 원하는 가방을 찾을 때까지 나는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끄끝내! 드디어! 가격도 크기도 색깔도 마음에 쏙 드는 가방을 발견하여 환희에 차올랐다.


그렇게 부산에 도착한 나는 귀여운 가방을 얻었다.


짠. 책이 한 권 정도 들어가는 귀여운 크기의 가방을 소개합니다.


참고로 충전기는 못 샀다. 워치도 그냥 전원을 꺼 버렸다.


하여튼 나는 내 여행과 인생을 대충 이런 식으로 꾸려 나간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쇼핑을 끝내고 난 뒤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장화 속까지 젖을 만큼 비가 쏟아져서 배달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치밀었지만, 그래도 부산에 와서까지 배달은 아니지! 하곤 눈 질끈 감고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도시 내에서 찔끔 이동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양심껏 지하철 역 세 개 정도는 건너서 나름 맛집이라고 하는 곳에 초밥을 포장하러 갔다. 초밥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뱅쇼를 파는 카페가 있어서 기꺼운 마음으로 갔다. 신체는 기껍지 않았지만 아마 정신은 기꺼웠으리라....


나는 작년 늦여름에서 초가을 넘어갈 때쯤에도 혼자서 부산을 다녀왔다. 그때는 지금보다 공황 증상이 훨씬 심할 때라 기동 범위도 제한적이었고 지금보다 두 배 세 배 더 힘에 부쳤다. 그래도 좋았다. 그때도 친구 A를 만났다. 그때도 뱅쇼를 마셨다. 나에게 뱅쇼는 쌍화탕과 비슷한 느낌이라, 지친 하루를 위로해주는 뜨끈함에 마음이 녹았다. 이번 여행에서도 뱅쇼가 생각났다. 서울서는 뱅쇼 생각 한 번 한 적 없는데 이상하게 부산에 오니 뱅쇼 생각이 난다.


옆 사람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음을 내며 우수수 떨어지는 세찬 물방울에 맞부딪쳐 가며 숙소에 돌아왔다. 초밥은 모양새가 다 일그러지고 뱅쇼도 흘러넘쳐 비닐봉투 바닥을 흥건히 적셨지만, 식사가 참 달았다. 고된 하루의 끝을 보상 받는 것 같았다. 고된 하루를 내가 자초했다는 사실은 잠깐 접어두고 가슴에 차오르는 뿌듯함을 만끽했다. 뱅쇼는 지난 해 마셨던 것보다 훨씬 계피 향이 진했고, 한국식 표현으로는 아주 '시원했다'.


기분 좋게 하루를 정리하고 잠을 청했다. 과연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의 소소하게 스펙타클한 여행은 또 어떤 국면을 맞이할 것인가. 으라차차 부산여행 첫째 날이 막을 내렸다.


잠도 잘 잤다. v(^.^)v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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