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L Apr 21. 2022

내기에서 용을 땄습니다!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

한 여인 있습니다. 부럽게도 금수저입니다. 더 부러운 것은 그녀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글쓰기에! 분명 엄청난 상상력과 통찰력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비범함을 엿볼 수 있는 시를 공개합니다.      


玲瓏花影覆瑤碁

日午松蔭花子遲

溪畔白龍新賭得  

夕陽騎出向天池      


당황할 거 없습니다. 그저 원본을 보여준 것일 뿐입니다. 나도 읽지 못하는 한자가 많기에 한글 해석본도 준비했습니다.      


영롱한 꽃 그림자가 바둑판을 덮었는데

한낮의 소나무 그늘에서 천천히 바둑을 두네

시냇가의 흰 용을 내기해서 얻고는

석양에 그를 타고 천지를 향해서 가네     


시를 통해 그녀가 창조한 세계로 들어가 상상의 나래를 펴보았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와 내기 바둑을 뒀고 이겨서 백룡을 얻었습니다. 신선하네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거나 백룡을 탄 기사를 기다리는 공주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이 대담한 여인은 내기를 통해 무려 용을 따 버렸습니다. 대국 상대는 신선이나 옥황상제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백룡을 타고 날아가다니, 대가댁 여식답게 풍류도 즐길 줄 알고, 용을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배포도 큰 여인입니다.   


누구냐고요?       


본명은 허초희, 많은 이들이 그녀를 천재 시인, 허난설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본명도 청초하고 아름답지만 아버지가 지어줬다는 호, ‘‘눈 속의 난초’, ‘난설’ 에도 기품이 서려 있습니다. 당시 여자들의 호에는 집 ‘헌’ 집 ‘당’ 자가 많이 붙었다는데, ‘헌’ 자가 붙으니 ‘난설헌’ 좀 더 줄이면 ‘설헌’ 이네요. 이름이 비슷한 걸그룹 멤버 설현도 생각나고, 이 여인! 왠지 요즘 세상에 태어났어도 굉장히 ‘힙’했을 것 같습니다.           

  

나와 허난설헌은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처음 만나 스쳐 가는 인연이 전부였습니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4월 초 강릉 출장 때문이었죠. 당시 바둑인들을 위한 유쾌한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도시가 ‘강릉’이었는데요. 장르가 예능이다 보니 바둑과 재미있게 엮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허난설헌 생가였죠. 제작진에게 너무나 고맙게도 그녀는 바둑과 관련된 멋진 시를 지어놓았습니다. 우리는 프로그램에 재미를 주기 위해 출연자들에게 허난설헌처럼 재치와 위트를 곁들여 바둑에 관련된 시를 써보는 미션을 내주었습니다. 세 명의 출연자들은 허난설헌의 생가 한 귀퉁이에 멍석을 깔고 화선지에 먹으로 허난설헌 4행시를 지었죠. 제법 괜찮은 방송 분량이 나왔습니다.                


“이분 금수저네.” 생가에 들어서자마자 한 출연자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만큼 허난설헌 생가는 넓고 격조가 있었거든요. 생가 곳곳에서 스케치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나는 카메라 동선 밖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잠시 허난설헌 기념관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냈죠. 그러다 화사한 꽃분홍색 표지가 인상적인 시집 한 권을 샀습니다. 꽃잎들이 바람결에 나풀거리는 한낮의 봄, 수백 년 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여인이 지은 시집을 들고 고택을 산책하다 보니 문득 지금 내가 혼자 걷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걸으면 나도 꽃잎들과 함께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시집으로 가슴을 꼭 눌러보기도 했죠. 수백 년 전 허난설헌도 이 길을 지나며 영롱한 꽃그늘 아래에서 시를 지었을까요? 비록 일하러 오긴 했지만 잠시 시집을 만지작거리는 여유를 부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서문에서 꽃분홍 표지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교과서와 이별한 지 너무 오래된 탓에 천재 시인이었다는 허난설헌의 일생이 어땠는지 기억이 흐릿했습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인터넷에 그녀의 일생을 검색했더니 고구마 백 개를 먹은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조선 시대 문장가 이덕무의 시문집, ‘청장관전서’의 기록에 의하면 허난설헌은 성품도 어질고 외모까지도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신이 허락하지 않은 딱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시대였습니다.             

조선 시대 대가댁 여식으로 태어난 허난설헌은 지금으로 따지면 사춘기 시절, 15세에 외모가 그리 잘나지도 않았고, 공부에도 그다지 뜻이 없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중매였겠죠. 역시 이덕무가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더군요. 그도 허난설헌의 삶이 조금은 안타까웠나 봅니다.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자식이 있었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녀 역시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무슨이유인지 자신의 시들을 모두 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다행히 동생 허균이 머리가 좋아 누나의 시를 어느 정도 외워놓았다고 하네요. 친정에 남아있던 시들을 모으니 한 권의 시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집에 실린 한 편의 시가 저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죠.         




사실 강릉에서 허난설헌만 만났다면 그녀의 일생에 대해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조선 시대에 불운한 여인들이 어디 한둘이었나요? 하지만 우리 팀의 다음 촬영지가 하필 오죽헌이었습니다. 율곡 이이와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태어난 곳, 그러니까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었습니다. 여기도 바둑과 엮을 수 있는 아이템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사임당의 그림이었는데요. 주로 화조도를 많이 그렸다고 알려졌지만, 천재 화가였던 만큼 산수화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역시 제작진에게 감사하게도 산수화 한 폭에 바둑을 두는 승려들을 그려두었죠. 아쉽게도 이 그림은 그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소세양이라는 시인이 그 당시 신사임당의 산수화를 직접 보고 묘사한 글을 남겼는데요. 소세양의 시문집 <양곡집> 제10권에 남아 있습니다. 혹시 궁금한 분이 있을까 소개하자면 바로 이런 글입니다.   

   

시냇물 굽이굽이 산은 첩첩 둘러 있고

바위 두른 늙은 나무 구부러져 길이 났네

숲에는 아지랑이 자욱하고

돛대는 안개구름에 뵐락 말락 하는구나

해 질 녘에 도인 하나 나무다리 지나가고

소나무 정자엔 야승 들이 한가로이 바둑 두네

꽃다운 그 마음 신과 함께 어울리니

묘한 생각 기이한 자취 따라잡기 어려워라     


우리는 출연자들에게 소세양의 시를 읊어주고 신사임당이 과연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상상해서 표현해 보라는 두 번째 미션을 내주었습니다. 그들이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나는 잠시 오죽헌을 둘러보았는데요. 오죽헌에 대한 다양한 안내문이 가득한 뜰에 유독 눈에 띄는 팻말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세계 최초 모자 화폐 모델 인물의 탄생지’. 만 원권의 모델은 율곡 이이, 오만 원권의 모델은 신사임당이니 옳은 말이지만 광고문구로 쓰이니 느낌이 사뭇 다르더군요. 그러다 허난설헌이 떠올랐습니다.


같은 조선 시대 여인이었는데, 강릉에서 태어난 금수저였는데, 천재적인 예술가였는데, 두 여인의 삶이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물론 문헌을 좀 더 뒤져 봐야겠지만 신사임당이 월등하게 좋은 남편을 만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 허난설헌의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위인전에서 또 다른 위인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아니 그녀가 오래 살아남아 더 많은 시를 남겼다면 신사임당을 제치고 오만 원권의 모델이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녀의 삶에 대한 기록을 보면 조금 힘들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린 시절 문학 안에서 백룡을 호령하던 그녀의 삶이 꼬인 이유 중의 하나는 친정과의 거리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혼한 허난설헌은 친정인 강릉을 떠나 안동 김 씨 집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게 물리적인 거리이든 마음의 거리이든, 온전하게 자신으로 살게 해 주던 사람들에게 멀어져, 아내와 며느리로만 살게 된 것이 문제였나 봅니다. 하지만 신사임당은 결혼해서도 강릉에 머물렀고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친정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만약 허난설헌이 시집을 가지 않고 시집만 냈으면 어땠을까요? 아니 결혼해서라도 강릉 인근에서 살았다면? 시어머니와 남편과 사이라도 좋았더라면? 친정엄마라도 자주 왔다 갔다 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가정법을 들이대는 일만큼이나 공허한 게 없다고 하죠.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보니 문득 ‘금수저도 아니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내 상황은 그리 나쁘진 않네!’라는 묘한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한 여인의 안타까운 인생 앞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 조심스럽고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느낀 위안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독립을 했던 나는 십수 년을 원룸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월세든 전세든 서울 집값이 좀 비싸야죠. 그러다 몇 달 전 방이 두 개인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가끔 서울에 올라와도 원룸이 불편하다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셨던 엄마는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자 제법 오래 머무셨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일상은 반짝반짝 윤이 나기 시작하더군요.           


일하느라 바쁜 딸을 챙기기 위해 엄마는 식사 준비부터 청소, 빨래까지, 한동안 집 살림을 도맡아 주셨습니다. 밤새 일을 하고 있으면 조용히 과일을 챙겨주고, 일이 잘 안 풀려 우울해하고 있으면 잠시 산책이나 하고 오자며 집 밖으로 이끌었죠. 부모님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던 십수 년 전 학창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다정한 애정을 가지고 내 일상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을 때 온전히 나의 일과 관심사에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 어렸을 때는 왜 몰랐을까요?     


덕분에 나는 고양이의 밥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강릉으로 출장을 올 수 있었고, 이사 간 집에 갑자기 물이 새도 당황하지 않게 되었으며, 일상에 여유가 생기니 오래도록 생각만 해왔던 이야기들을 써볼까? 하는 마음도 먹게 되었습니다. 만약 결혼했다면 이런 시간들이 가능했을까요? 그땐 다른 행복을 느꼈을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동화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마 탄 왕자를 마냥 기다리는 공주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니까, 모험을 통해 새하얀 용을 쟁취하는 용감한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면 어떨까요? 물론 그녀 곁에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려 깊은 가족이 있을 겁니다. 온전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들일 테니까요.      


                                                             (2018년 어느 봄날의 기록) 

                                                                                                       

작가의 이전글 봄날의 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