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떤 것까지 해봤니?"
기준이 된다는 것.
나의 경우에는 "무언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해봤다"의 기준도, 판단의 기준도 모두 어느새 <헤드윅>이라는 작품이 되어있었다. 내가 이걸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생각해볼 때 "헤드윅을 볼 때처럼 미쳐있었나?"부터 생각해보게 되고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걸 위해서 어디까지 해봤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나 헤드윅이 너무 좋아서 열번 넘게 보러 갔었어! 그거 티켓 구하겠다고 인터파크 새로고침을 열시간동안이나 해대느라 난시가 생겼지 뭐야."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사실 그때는 주변 지인들이 그 작품이 대체 뭐길래 그렇게까지 보냐고 물으면, 좋아서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냥 그럴 수밖에 없어. 정신차려보니 내가 그러고 있었더라고."라고만 답해줬다.
몇시간 전 <스물다섯 스물하나> 5화를 보고 펑펑 울었다.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치만 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보고있자면 그냥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얼마 전에는 드라마가 다 끝나버렸는데도 한참을 목놓아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나는 평범한 환경에서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평안하게 물 흐르는 듯한 삶을 살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된다고 해서 그런 줄 알며 살았고, 공부를 하다보니 적성에 맞았다기보다는 좋은 성적에 욕심이 생겼다. 하고싶은 일이 생겼을 때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업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 더 학업에 매진했고, 원하는 곳에 진학은 실패했지만 어쩌다보니 남들 다 가는 대학은 다니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정말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바람처럼 살아왔다. 어쩌다보니 계속 알바를 하고 있었고, 과탑이었던 친구 옆에서 같이 공부하다가 뜻밖에 고학점자가 되었고 남들이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다니길래 나도 '영끌'해서 다녀오곤 했다.
그치만 백이진을 보고 있으면 남들은 잘 모르는, 숨겨진 또 다른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조차도 숨겨놓고 잘 보지 않았던 진짜 나의 모습을. 거대한 시대 앞에 가로막혀 괴로워하는게, 좌절하는게, 다시 일어나고 싶어하지만 힘에 부치는게, 그럼에도 다시 희망을 보고 용기를 얻어 조용히 웃어보는게 너무 지금의 나같았다. 백이진에게서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사실은 굳이 말로 꺼내보이고싶지 않아서 숨겨놨던 나를 봐버린 것만 같아서 엉엉 울고 말았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터지는 울음을 참지 못하는 건, 단순히 나희도와 백이진이 서로를 구원하는 아름다운 서사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 안에 있는 나만의 아픔을 꺼내어서 소중히 닦아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헤드윅을 본 이후로 관람했던 공연들의 만족도를 평가하는 문장들도 대개 이러했다. <어쩌면해피엔딩>이라는 극을 볼 때에도, <엘리펀트송>이라는 극을 보고 나서도, 한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을 보고나면 항상 헤드윅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와, 이것도 꼭 헤드윅같네..."
거의 헤드윅에게 정신세계를 지배당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 모든 만물은 정말이지 상대적이다. 힘듦의 정도도, 그 힘듦을 견딜 수 있는 한계점도, 반대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정도도 모두 다 제각각이다. 그래서 기준이란 누가 정해줄 수도 없고 나조차도 명확하게 내 기준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요즘들어서는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수도없는 선택지 앞에서 나는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주는 것'을 골라내야 한다. 인터넷 공간에 떠다니는 수많은 말들 중에서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들이라며 글이고 영상이고 홍수처럼 쏟아져나온다. 그 중 진짜로 내가 알야아 할 것이 무엇인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바탕으로 내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할지. 나만의 선, 나만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의 확실한 기준을 갖게 된 나는 행운아인 것 같다.
나는 되뇌인다. 헤드윅을 만난 건 정말이지 나에겐 운명과도 같다고.
포기하고 싶어질 땐 "너 헤드윅 표 안구해질 때도 지금처럼 포기했어? 아니잖아."
나는 왜이렇게 운이 없을까 좌절하게 될 땐 "너 헤드윅 3열 어떻게 갔다왔어? 그때 많났던 수많은 행운들은? 아니잖아. 너에게도 분명 행운은 있어."
행복하다는 게 뭐였더라, 나한테 열정이라는 게 있었던가. 문득 아득해질 땐
"헤드윅 보러다닐 때 너 어땠어? 그때를 생각해 봐."
헤드윅을 처음 보러 가겠다고 티켓을 예매했을 때만 해도 공연 하나가 이정도로 내 삶에 큰 영향력을 가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티켓을 구하고, 구한 티켓값을 치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구했다. 일주일에 두세번씩 서울을 오가던 세달간의 생활을 마무리한 뒤에는 내가 뭘 한거지? 남들은 취업한다고 스펙쌓고 인턴하고 자기소개서 쓸 동안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덕질에 정신이 팔려서 뭘 한거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또 스스로를 괴롭혔다.
쓸데없는 경험은 없다. 그 일련의 시간들은 분명히 무언가의 흔적을, 깊고 진한 여운을 내게 남겼다. <헤드윅>이라는 작품에 쏟아부은 열정과 체력이 쓸데없는 낭비가 아니라 내게 운명이 된 것처럼, 내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선택과 판단의 기준이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