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과 순종 사이에서

Chapter 4. 무의식

by StoneTiger

2021년 7월 16일, 금요일 오후였다. 두 주간의 고된 자가격리를 마치고, 오랜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 댁 작은 방 한켠에 몸을 뉘였다. 몸은 피로했지만 마음만은 설렜다.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벗들과의 재회, 잦아든 코로나의 불안 속에서도 얻은 첫 번째 백신 접종의 안도, 그리고 건강검진과 치과 치료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날 점심, 나는 그동안 외로움의 기제로 작용했던 ‘회복의 알코올’을 곁들여 오랜 친구들과의 자리를 즐겼다. 시원한 맥주잔을 기울이며 웃음꽃을 피웠던 그 순간까지가, 내게 남겨진 사고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어지는 날들은 깜깜한 안개 속에 묻혀 버렸다.

의식을 되찾은 곳은 낯선 병원 중환자실. 시계를 보니 7월 29일, 사고 발생 후 14일 만이었다. 그 14일간 나는 의식이라는 껍질을 벗고, 온전히 ‘무의식’의 강을 떠다니고 있었다. 사고의 전말은 이랬다. 술자리에서 그만 아찔한 충돌이 있었고, 코뼈가 산산이 부러졌다. 그 충격이 뇌출혈을 일으켰고, 부서진 코 뼛조각은 폐로 흘러 들어가 acute pneumonia, 즉 급성 폐렴으로 이어졌다.

흉터가 남을 만큼의 큰 상처였지만, 감사하게도 뇌출혈은 자연 치유의 손길을 받았다. 수술대에 오르지 않아도 될 만큼 피가 스스로 흩어졌고, 신이 주신 두 번째 기회는 그렇게 찾아왔다. 그러나 폐렴과 뇌출혈의 이중고는 나를 이불 속에도, 산소 호흡기 너머에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무의식의 어두운 수렁 속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무의식 속엔 무엇이 존재할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공허일까, 아니면 삶의 잔잔한 파편들이 춤추는 무대일까? 내 경험을 한 줄기로 정리하자면, 무의식의 풍경은 크게 세 가지 감각 영역으로 펼쳐졌다.

첫째, ‘차가움’의 비명 같은 감각이다. 뇌출혈 환자에게 저체온 유지가 치료적이라고 하니, 간호사들은 두터운 이불 대신 시원한 바람을 선물했을 것이다. 그 결과 내 머릿속에는 새벽바다 위를 스치는 싸늘한 바람이 머무르고 있었다.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배 위,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맞선 싸늘함처럼. 또 어떤 순간에는 한여름 뙤약볕이 스러지고 남은 새벽 공기의 서늘함이 몸을 감싸 안았다. 그 추위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 생명을 느꼈다. 얼어붙은 감각이 깨어나게 한 것은, 온기를 갈망하는 영혼의 몸부림이었다.

둘째,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저릿함이다. 의식이 깨어나기 전, 나는 두 자녀를 떠올렸다. 열 살 된 딸의 환한 미소, 아홉 살 된 아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번쩍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장난치는 모습, 집에서 공부하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나는 그들에게 “아빠야!”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들은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가슴 속 깊이 솟구치는 그리움은, 마치 숨이 막힐 듯한 고통으로 번졌다.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모르는 슬픔, 그 단절감은 마치 손가락 사이에 모래가 흘러내리듯 고통스러웠다.

그리움의 파도는 부모님과 아내, 지인들까지 두루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자녀의 모습이 가장 깊게 뿌리내렸다. "내가 살아야만 그들이 웃을 수 있다." 그 한 문장이 나를 붙들었다. 차가움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따뜻한 내일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오직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 때문이었다.


셋째, ‘미래’에 대한 환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살아야겠다는 뜨거운 의지가 내 안에서 불타오르며, 죽음의 경계 너머에서 삶의 빛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그 순간, 눈앞에는 마치 초고속으로 전개되는 영화 예고편처럼 다채롭고도 강렬한 환영이 스쳐 갔다.

그 환영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첫째, 무한히 확장된 대형 마트의 광경이었다. 광활한 복도는 끝없이 이어졌으며, 벽면을 가득 메운 네온사인은 오로라처럼 반짝였다. 매대 위에는 눈부시도록 선명한 포장지의 상품들이 정교하게 진열되었고, 스피커에서는 희미한 알림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자, 음산한 전조등 아래 자판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사람의 형상을 본뜬 홀로그램 버튼을 누르면, 찰나에 그 인물과 손짓으로 대화하는 듯한 체험이 펼쳐졌다. 허리를 감도는 눅눅한 습기와 상품의 화학 냄새가 섞여, 소돔과 고모라가 현실이 된 듯한 불안감을 자아냈다. 이곳은 탐욕과 유혹이 결합된 군중의 욕망을 경고하는 신호탄 같았다.


둘째, 유전자 변형 혹은 복제 인간들의 참혹한 전쟁터였다. 회색빛 포연 속에서 형상 없는 함성들이 울려 퍼졌고, 피투성이가 된 중력장 아래 무너진 폐허가 끝없이 펼쳐졌다. 복제된 인간 군단은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프로그래밍된 본능에 이끌리듯 난투극을 벌였다. DNA 구조가 부풀어 오른 괴생명체는 기계장치에 결합된 팔과 다리를 휘둘렀으며, 그 소리는 금속이 부러지는 금속성 울림으로 내 귓가를 찢었다. 불타는 산림 지역을 배경으로, 초록빛 광선이 양 무리를 가른 순간에는 독버섯처럼 흩날리는 빛이 사지를 꿰뚫었다. 코로나19 시대 mRNA 백신의 진보를 떠올리며, 과학이 만들어 낼 인간 본연의 윤곽이 이토록 왜곡될 수 있다는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기술의 문을 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 한가운데서 머릿속을 울렸다.


셋째, 끝없이 광활한 우주 여행의 여정이었다. 눈부신 별빛이 모래알처럼 산재한 칠흑의 공간을 가로질러 나는 듯 떠다녔다. 나는 무중력 상태에서 천천히 뒤돌아보며,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듯한 은하수의 무게를 느꼈다. 수줍은 초승달처럼 떠 있는 조각 운석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고, 그 표면에는 오래된 우주인들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새겨진 듯 보였다. 머리 위로는 검게 빛나는 우주선이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지나갔고, 함몰된 대기권 너머에는 잿빛 날개를 펼친 우주 독수리처럼 보이는 기계 생명체가 포효했다. 극적인 순간, 우주 정거장의 창문을 통해 빛살이 내리쬐었고, 그 빛은 내 전신을 얼어붙듯 감쌌다. 눈부심과 동시에 다가온 고요함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빚어낼 책임에 대한 무거운 숙제를 떠올리게 했다. 이 환상은 마치 삶과 죽음, 인간성과 기계성 사이의 미묘한 경계 위를 걷게 하는 시련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세 가지 환영은 내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한데 뒤엉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으며 오히려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강렬했다. 이를 통해 나는 미래라는 불확실한 공간에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환상들은 나의 매우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의 결과물이라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어떠한 계시가 담겨져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14일 동안의 무의식 기간에는 많은 장면과 환상이 나의 뇌뢰를 스쳐갔지만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을 떠올려 써보았다.


중요한 부분은 무의식 상태의 중환자라도 생각을 하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슴에 사뭇 치도록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생각 없이 잠자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는 누군가는 인생을 살아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치열하게 견뎌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의식의 공간은 단순한 공허가 아니다. 침묵 속에서도 수많은 감정이 파도처럼 흔들리고, 기억의 조각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고통의 어둠과도 같은 무의식 속에서, 사랑의 빛줄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깊은 바다 밑에도 어둠을 뚫고 올라오는 빛 한 줄기처럼, 그리움은 나를 살아있게 하는 등불이었다. 숨이 막힐 듯한 고요 속에서도, 내 안에서는 부모님의 온기, 자녀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가 메아리쳤다.

또한, 이 과정은 단순한 생리학적 반응이 아니라 영혼의 여정일지도 모른다. 뇌가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해도, 영혼은 그 이상을 경험할 수 있다. 무의식의 경계에서조차 영혼은 사랑을 갈망하고, 기억을 붙잡으며,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이는 의식이 깨어난 이후에도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 삶을 더욱 진하게 마주하도록 이끈다.

결국, 그 14일의 침묵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인간의 존엄과 사랑의 불멸성이다. 우리는 비록 육체가 위태로울지라도, 영혼은 결코 그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응시하며, 그 의미를 찾아 나선다. 무의식의 심연에서 일어난 이 작은 기적들은, 우리가 서로에게 전할 수 있는 위로와 희망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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