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친구 만한 것이 없다?
서방 주도의 전쟁없는 장미빛 미래를 그렸던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유명한 저서 <역사의 종말>이 상상했던 1990년대 미국의 독무대와 달리, 2001년 이후 미국은 세계 곳곳의 전략적 핵심 지역에서 발이 묶인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테러리즘의 부상으로 미국 대외정책의 초점은 중동으로 옮겨갔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기조차 힘들었다. 2008년 금융위기, 2019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 역시 진창에 빠졌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빠져있는 동안 중국은 무섭게 성장했다. 국경을 맞대는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지 않았던 중국은 WTO 가입을 허용되고 자유시장 경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최근에는 미국의 대테러전쟁 수행과 중국의 WTO 가입의 직접적 연관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중국을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킬 것이라 보았다는 것, 국제적 차원의 자유시장경제 실현을 목표로 하는 WTO 가입 이후 관세장벽이 낮아진 세계 시장에 중국산 제품들이 빠르게 점령했다. 이것은 중국의 고도성장은 물론 세계경제의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처럼 보였다. 미국이 전쟁과 금융위기로 위기를 맞은 사이, 중국은 2000년대 말 일본의 GDP를 넘어서며 G2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01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의 중요한 변화는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아시아 중심 전략'(Pivot to Asia)로 상징된다. 중국은 세계의 우방이자 평화적 도약이라 설득했던 이전의 도광양회와 화평굴기에서, 시진핑 집권을 계기로 남중국해에서의 해상 분쟁, 일대일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 분발유위(떨쳐 일어나 해야할 일을 한다)로 빠르게 변모했다. 중국의 급속한 부상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다는 인식과 그에 따른 대응은 정당을 초월하여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행정부 전체를 관통하는 미국 대외정책의 일관적인 방향이 되었다. 중국과의 무역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였지만, 어느 한 쪽의 승리가 결정되기 전에 세계를 뒤덮은 전염병이 그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전염병의 압도적 피해는 100만 명에 육박하는 사망자를 내고 있는 미국에 쏠려있다.
이번에는 러시아가 미국을 또 다시 분쟁의 수렁으로 빠뜨리게 하였다.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 속에서 미국의 전통적 우방은 동맹의 역할에 관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오랜 친구들 대서양 동맹 나토를 말함이다. 창설 70년이 넘은 나토는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안정적 재건과 공산주의의 확산을 차단하는 역할을 넘어, 소련 붕괴 이후에는 발칸반도의 분쟁 개입과 동유럽의 탈공산화, 그리고 이들 지역 국가들의 나토 가입을 바탕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어왔다.
그러나 기후변화협약, 이란 핵합의, 유네스코 탈퇴 등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은 세계 속에서의 역할과 영향을 스스로 축소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나토가 해체될 것이라는 볼턴 전 보좌관의 폭로가 단순히 음모론으로 취급되지만은 않았던 것은 이와 같은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특정한 시기 트럼프라는 독특한 지도자를 만난 우연의 결과인지, 아니면 미국 대외정책의 '일관성 있는 흐름'인지는 바이든 행정부의 행보를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토의 해체론까지 불거진 트럼프 행정부 시기의 논쟁을 넘어, 현 우크라이나 사태로 나토는 새로운 변수가 되었다.
사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유럽동맹은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멀어져갔었다. 그러면서도 테러와의 전쟁을 넘어 2010년대부터 중국의 부상을 강력하게 저지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은 최근까지 쿼드(호주, 인도, 일본, 미국) 등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 흐름 속에서 등장한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에게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 균형을 다시 맞춰야 하는 중대한 과제가 되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은 오히려 나토 회원국들을 단결시키고 있다. 미국과 서방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실질적인 동진에 착수했다. 나토는 최근 회원국들에게 GDP의 최소 2%를 국방에 투자할 것을 권고했다. 더불어 동유럽과 발칸유럽 국가들의 나토 회원국 가입을 넘어 이제 서방 국가들은 폴란드, 발트3국 및 루마니아 등 동유럽에 병력 배치를 계획하였고 이 중 일부는 이미 시행되고 있다. 러시아와 인접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나토의 전력증강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 사이 나토 탈퇴 등 집단안보를 불신하고 개별적인 국방력 강화를 주장하는 유럽 각 국에서의 목소리는 큰 도전을 받고 있다.
현 우크라이나 위기로 러시아의 주변국들도 발빠른 대응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특히 중립국들도 포함되어있다. 스위스는 푸틴을 비롯한 러시아 유력 인사들의 자산을 동결하고 입국을 금지함으로써 러시아 제재에 참여하고, 난민 구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중립국인 스웨덴과 핀란드는 국내 여론에 힘입어 나토 가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바이든 대통령의 제안으로 스웨덴과 핀란드의 정상들과 국방장관들이 안보문제를 위한 긴급 회담에 나섰다. 며칠 전, 덴마크 국방장관의 나토 본부 방문이 이루어졌으며, 25일에는 노르웨이 주도의 나토 연합훈련을 위한 나토 사무총장의 노르웨이 방문이 예정되어있다. 과거 러시아의 침공 때와는 달리 중립국들마저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용론과 회의감에 젖어있던 나토의 역할에 대한 수액주사가 되고 있다.
나토 클럽의 인싸이자 주인공 격인 미국은 환영받으며 유럽 무대에 존재감을 나타낼 복귀 준비를 하고 있다. 3월 15일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바이든 대통령이 24일 나토의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하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는 "억지력과 방어 노력을 논의"하고 "나토 동맹국들에 대한 굳건한 약속을 재확인"할 것이라 밝혔다. 더불어 바이든 대통령의 방문 목적이 러시아에 대한 "지속적인 협력과 단결된 대응"을 성취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나토의 재부상이 감지되는 부분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의 대외정책에 관한 여러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한 쪽에서는 오바마 이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특정 지역으로 전략적 집중이 쏠려 북대서양 동맹이 방치되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적극적 역할 부재로 러시아의 침공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교착상태에 빠진 러시아군을 보며 유럽으로의 방향전환이 불필요함이 증명되었고,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옳았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바이든의 미국은 나토와 유럽으로 아시아와 균형을 맞출 것인가? 그로 인한 미중 간의 대립에서 한반도에 나타날 나비효과는 무엇인가? 브뤼셀에 도착한 바이든 대통령의 행보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