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평화는 '의지'와 '믿음'
칸트가 말하는 세계평화를 이루는 조건
임마누엘 칸트의 1795년 저작 <영구 평화론>은 세계가 전쟁 없는 평화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세 가지 조건(확정조항)을 제시했다. 가장 중요한 첫째는 각 국의 시민 정치체제가 공화정체(republican)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공화정에서는 전쟁 수행여부를 국민들의 동의라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전쟁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고, 이 때문에 전쟁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한다.
둘째,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방(federalism)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이 국가의 체제 속에서 보호 받듯이, 국가도 UN과 같은 국가 연방 체제 속에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세계시민권은 보편적인 우호관계의 조건에 의해서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각국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동, 방문할 수 있고 서로 교류할 수 있되, 본국의 시민으로서의 특권이 있고 방문자의 권리는 일정부분 제한된다고 덧붙였다. 칸트가 이 내용을 주장한 지 125년이 지나서 국제연맹(LN), UN 및 EU가 창설되었다.
민주평화론
국제기구의 등장 외에도 칸트의 사상은 민주평화론의 기초가 되었다. 민주평화론은 대의제, 공화제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들끼리는 전쟁의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것이다. 전쟁이 발생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독재국가가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1990년대 공산주의가 무너진 국제체제에 대하여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 주장했던 것과 같이 많은 전문가들이 민주주의 진영의 승리로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가 지속될 것이라는 장미빛 전망을 내놓았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평화를 지향하고, 권위주의는 항상 갈등으로 나타난다는 민주평화론의 전제는 명료하면서도 매력적이다. 국가가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이익은 호전적이지 않고 인권, 조화, 공존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에 국가의 이익 실현 그 자체가 평화에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권위주의 체제에서 독재자는 내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가의 이익이 외국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호전적 성향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민주평화론은 전 세계가 공화제와 대의제에 기초한 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간다면 자동적으로 세계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다. 아직 현실로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믿음'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이론적으로 탄탄한 구체성과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민주평화론의 또 다른 전제는 민주주의가 절대적으로, 자연적으로 선호되는 국가 체제의 형태라는 것이다. 이 전제는 허용만 된다면 자유가 억압되고 권리가 침해된 국가의 국민들이 민주주의 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지지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로의 정권 교체와 수립이 쉬울 것이라는 예상으로도 이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역사적 상식으로도 충분히 반론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긴 논의와 투쟁과 합의를 통한 성취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 선포된 21세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겪은 실패였다.
냉전 이후 세계에서 미국의 압도적 우위는 각 국에서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정치체제로 등장할 것이라는 생각마저 가지게 했다. 20세기 중국과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가 유입되어 일본과 같은 '평화로운 경쟁자'가 될 것이라 희망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드러난 러시아와 중국의 미국에 대한 대립적 행보,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권위주의 정부들이 등장하자 민주평화론에 대한 거센 도전이 분명해졌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스스로 "역사의 종말의 종말"이라 인정했다.
민주평화론의 반대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국제정치학자로 유명한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의 세계체제론이 말하는 구조적 현실주의를 들 수 있다. 민주평화론은 개별 국가들의 국내정치 체제가 자동적으로 세계체제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본다면, 반대로 세계체제론은 국제정치의 무정부 상태(anarchy)가 개별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무정부 상태에는 개별국가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냉혹함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은 북한, 중국에 대한 태도와 인식, 징병제와 지상군 중심의 정책, 좌우의 이분법적 대결의식, 국가간 관계 변화보다는 현상유지에 초점을 두는 현실이 작용하며, 이는 미국의 대외정책의 영향이 작용한다. 공교롭게도 세계체제론 역시 민주평화론과 같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역사적 맥락 없이 강대국 중심주의의 시각으로 보는 현실주의 속에서 한국의 정치체제와 대외정책은 그저 자발적 선택이 아닌 강요된 선택이 된다.
민주주의가 열어가는 평화로운 세계
이쯤되면 민주평화론은 폐기되어야 할 이론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영국 보수당의 전 대변인이자 국제정치학자인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민주평화론을 '게으르다'라고 말했다. 국가의 고유한 지정학적 환경과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민주주의는 평화를, 권위주의는 갈등을 지향한다는 단순한 설명으로 독재정권에 경제적 제재를 가하거나 전쟁으로 독재자를 축출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주었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을 거꾸로 보면 민주평화론의 전제, 즉 민주주의가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보완 장치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비용에는 군사 외에도 경제, 교육, 복지, 인도주의 등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한다. 영화 <찰리 윌슨의 전쟁>에서 통렬히 비판하는 것과 같이, 미국은 20세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수억 달러를 지원했음에도 학교를 짓는 데에는 단 1%의 비용도 쓰지 않았다. 당시 미국이 지원한 무기로 아프가니스탄은 1990년대 내내 내전에 휩싸이고 그 과정에서 극단주의 무장세력이 성장하여, 세계는 21세기의 서막을 테러리즘이라는 갈등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20세기와 같이 21세기 미국은 또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포기했다. 2001년부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지출한 총 비용 9,866조원에서 국무부와 국제개발처 등이 주도한 재건 사업에는 0.5%인 52조원만을 썼다(BBC, 2020).
최근의 행보와 메시지들을 보면 미국을 위시한 서방은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를 위한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민주주의와 평화의 세계는 더 암울해 보일지 모른다. 민주주의가 세계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현실이 되려면, 현실이 될 때까지 믿음을 바탕으로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유럽연합은 칸트 이래 수백년 동안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꿈꿔온 사상가들이 평화로운 유럽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믿음과 희망을 실현시켜 온 실험의 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 꿈은 오랜 역사적 부침을 통해 전쟁 가능성이 가장 낮은 유럽을 만들어냈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재건을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 경제 회복을 위한 국내 정책, 시민 의무교육과 복지의 확대 등 수십년의 세월동안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토양을 만들어냈다. 민주주의가 평화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믿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할 수 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될 수 있다는 것, 언젠가는 동아시아가 화합과 협력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언젠가는 세계가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한중일이 협력을 위한 국제기구를 창설하고, 공동 은행과 화폐를 도입하며, 연합 군사체계를 구축하고 공동의 경제 개발에 나서는 오늘날 유럽연합과 같은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것은 칸트가 말했던 국제연맹이나 오늘날 UN이 현실에 나타나기 전, 1910년 도마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제시한 구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