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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e Mar 18. 2023

새벽공기의 만국성

명상, 새벽공기, 부엔 까미노

나고 자란 나라가 아닌 곳에 새로이 도착하면 낯선 오감을 마주한다. 대중교통수단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체취,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언어와 흘러나오는 음악이, 들꽃과 잔디와 가로수들이 낯설다. 모든 것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행의 묘미이자 두려움이다. 


그런데 새벽 공기의 오감은 어디나 비슷하다. 짙게 깔린 어둠이 웅장한 쪽빛으로 변했다가 푸름한 하늘을 거쳐 쨍한 한낮의 밝음에 자리를 내어주는 그 빛깔들이, 똑같다. 공사장 소리도 사람들의 목소리도 자동차의 엔진 소리도 뜸한 고요한 시간에 원근으로 지저귀는 새의 소리조차 비슷하다. 밤 사이 짙어졌던 수증기가 흩어지면서 이슬을 맺을 마냥 손 끝에 바스락 닿는다. 청량하고 싱그러운 새벽 공기의 냄새가 콧 속을 채운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수로 만들 수만 있다면 만들어 내고 싶은, 어제의 우환을 정리하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어디서나 똑같은 새벽 공기의 냄새이다. 그리고 익숙한 냄새는 기억을 불러낸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 하루는 또 얼마나 끔찍할까, 일 초라도 하루를 피해보려고 눈을 뜨는 것을 최대한 미루던 날들이 있었다. 아파트에서는 창문을 열 일도 잘 없었다. 그렇게 새벽 공기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 요즘은 때때로 새벽 대여섯 시에 일어나 명상을 한다. 내가 요즘 가장 사랑하는 오롯한 나만의 것, 고요한 새벽 시간이다. 명상을 요가로 대체하기도 한다. 시간이 남는다면 아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하기도,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전에 눈을 뜨자마자 해야 할 일은 새벽 공기를 맡고자 우선은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한두 번 들이마시는 일이다. 그 숨은 2012년에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위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순례길의 하루는 단순했다. 순례자들은 대개 아무리 늦어도 오전 7시에 일어나 떠날 채비를 마친다. 8시 전에는 가까운 카페에서 빵과 카페콘레체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내고 순례를 시작한다. 그렇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에 순례길을 걸으며 매일 아침 온몸으로 새벽 속에 들어갔다. 하늘이 쪽빛 장막을 스르륵 거두면서 시커멓던 건물들과 나무들이 제각기 제 형태와 색깔을 푸름하게 드러내는 것을 바라보면 뭐랄까, 안도감이 든다. 그 설렘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는 걸었다. 혼자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동료 순례자들과 즐거이 대화하며 걷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나면 “부엔 까미노” 인사를 했다. 오전에는 길가에 앉아 사과 한쪽을 먹고, 정오에는 식당에서 커피와 함께 간단한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또 걷는다. 오후 네다섯 시에는 그날의 순례를 마무리하고 알베르게에 짐을 푼다. 샤워를 하고, 그날 땀에 젖은 옷을 바로 세탁을 한다. 세탁할 것은 그날 입은 옷뿐이라 금방 끝나서 세탁기나 건조기 경쟁은 치열하지 않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순례자들과 와인을 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일기를 쓰고 잠을 청했다.


하루의 순례의 시작을 함께 하는 쪽빛 하늘 


30년 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밥맛이 좋던 때는 순례길을 걸을 때였다. 천 원짜리 바게트빵과 올리브유만 있어도 그 순간이 충만했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입에 꾸역꾸역 쑤셔 넣는 것인 줄만 알았던 풀떼기를 수북이 쌓아 올린 샐러드가 그렇게 감칠맛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가끔 아주 영세한 식당에서 시들해진 풀떼기와 매운 기를 전혀 빼지 않은 생양파를 내어 준다 하더라도 전혀 실망스럽지가 않다. 그조차도 맛있어서 깨끗이 먹어치웠다. 돼지고기 스테이크가 소고기만큼이나 맛있을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자랑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건강한 똥을 매일 보았다. 저녁에는 매일 같이 동료 순례자들과 동네 마트에서 싸구려 와인을 몇 병씩 사 와 나누어 마셨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비싼 와인과 비싼 고기를 먹더라도, 그때 먹었던 삼 유로짜리 와인과 질긴 목살 스테이크만큼의 행복이 나지를 않는다.


순례길을 걸을 때에도, 순례길에 다녀와서도 사람들은 많이 물었다. ‘너는 왜 길에 왔니?’ ‘왜 거기까지 갔다왔니?’ 많은 순례자들이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길이 나를 불렀다’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쉬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끌려서 가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길이 나를 불렀다’는 그 함축된 말속에는 반드시 기구한 삶의 굴곡이 있어 그 치유의 여정의 시작점으로 순례길에 오게 된 웅장한 사연이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순례길에 가기 전에도 순례길 위에서도 나는 내내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지만 딱히 우울증을 치유하고자 선택한 길도 아니었고 삶이 순례길의 전과 후로 나뉠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실제로도 그러하지 않았다. 대단한 사연도 없는데 ‘길이 나를 불렀다’는 말속에 함의를 담고 싶지 않아 한 나라에 오래 있는 여행을 좋아해서, 걸으면 건강해질 것 같아서, 가톨릭 신자라서요, 등의 그때 그때 다른 변죽을 울리는 대답을 했다.


순례길을 다녀온 후, 한동안 앞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성취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점점 커지고 현실에 대한 불만이 더해갈 뿐이었다. 어쩌다 브레이크를 걸고 한국을 잠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의 기본은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내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감각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하는 (doing) 것이 아닌 그저 그 순간에 존재(being)하는 것을 연습한다. 생각해 보면 그 명상이라는 것은 일상 어디에나 있다. 동네 꼬마들이 길가의 가로수에 열린 이름 모를 열매 몇 개 만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몇 시간이고 소꿉놀이에 몰입할 때, 나의 작은 아들이 부러진 플라스틱 삽을 주워다 모래를 파고 담는 것만으로도 까르르 웃을 때 아이들의 마음챙김을 본다.


순례길에서 나는 충실히 존재했다. 그날의 순례를 마치면 풍족했다. 무얼 먹어도 꿀맛이었다.  그날의 걸음걸음, 그날의 먹는 것, 그날의 오감에 존재했던 순례는 내가 마음챙김에 충실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길이, 길 위에서 잠깐 존재하다 가라고 나를 불렀나 보다. 대단한 아픔이 있을 필요도 그것을 멋지게 극복할 필요도 없이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스럽게 걷고 맛있게 먹고 달콤하게 자다가 가라고 불렀나 보다.


새벽공기의 냄새는 어디나 똑같다. 순례길의 새벽, 이곳 밴쿠버의 새벽, 나고 자란 서울의 새벽, 사랑했던 강릉의 새벽 공기가 어디나 초지일관 청량하다. 오늘의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쪽빛 하늘을 망막에 새기며 톡 시원한 공기를 한번 콧속에 불어넣으면 나는 순례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다시 오늘의 위에 두 발로 서 있다. 한 때 발밑을 내려다보면 발을 빼지 못하는 우울의 뻘에 빠져있는 두 다리를 발견하곤 했다. 우울하고 불안할 때마다 찾아가는 자기혐오와 수치심의 나무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내 우울의 고향이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엉망인 하루를 보내더라도 다음날 어김없이 찾아오는 새벽의 공기가, 다시 찾아온다는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을 든든한 새벽 하늘은 이제 나의 행복의 고향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나의 우울의 고향과 행복의 고향 모두를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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