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도시, 강릉
나는 상당히 알아주는 집순이이지만, 짧은 강릉 살이 동안 아이에게 다양한 체험을 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주중이면 어린이집 하원 후에 단 둘이, 주말이면 아이 아빠를 대동하여 세 식구가 강릉의 구석구석을 다니려 애를 썼다. 강릉에서 고작 18개월 된 아이와 여러 레스토랑과 카페를 단 둘이 다니기도 했다. 호기심 많고 바깥놀이 좋아하는 성향의 아이와 단 둘이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단 순조롭다. 물론 노하우가 필요하다. 가급적 관광객이 적어 레스토랑이 바쁘지 않은 평일에 야외 자리가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야 한다. 야외 자리에서는 아이가 소리를 질러도 거리의 일상 소음에 희석되고 음식을 흘리더라도 다소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는 앉히지 않고 레스토랑의 소품들을 구경시키며 주의를 돌린다. 그러나 내가 마음 놓고 아이와 이곳저곳을 충분히 탐험할 수 있었던 것은 강릉 시민들의 친절함 덕분이다. 아이들을 향한 시민들의 태도를 통해 그 도시의 여유를 가늠할 수 있다. 하루 소진량만큼의 미소에 더해 여분의 미소를 항상 주머니 속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여유라면, 강릉은 서울보다 여유롭다. 아이와 있으면 마트에서건, 레스토랑에서건, 카페에서건, 대학교 앞 번화가에서건 다들 그렇게 미소 지어주고 손을 흔들어주고 가방을 뒤져 사탕 하나씩을 꺼내 주셨다. 강릉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우리는 마침내 아이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캐나다 밴쿠버에 왔고, 이곳에서 아이들은 어딜 가나 환영받는다. 그러나 적어도 내 기억에서만큼은, 강릉도 못지않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도시였다. 수북이 쌓인 그곳의 사진들을 가끔씩 들춰보며 흩어진 추억의 편린들을 유리병에 모아 두고 싶었다. 이 글의 목적은 뇌세포들에 이리저리 흩어져 저장된 그날의 감정들과 아들의 찬란했던 순간들이 휘발되어 날아가기 전, 순전히 나의 기억을 한 곳에 꼭꼭 눌러 담기 위함이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장소와 사진과 기억들을 긁어모은, 시간적, 공간적 연관성 없이 나열되는 중구난방식의 타래가 될 것이다. 타인에게 친절하려는 의도의 글은 아니나, 혹시라도 아이를 데리고 강릉에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부모님들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손톱 부스러기 정도의 도움이 되기를 바라본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친정집으로 율곡 이이의 생가이다. 입구의 '세계 최초 모자 화폐 인물 탄생지'라는 소개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귀여운 입간판들을 지나 거대한 부지에 입장하면 정갈하게 정리된 공원과 으리으리한 저택이 나온다. 뒤뜰에 검은 대나무가 자란 것을 계기로 오죽헌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강릉시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면, 비수기의 평일에는 거의 아무도 없는 드넓은 오죽헌을 뛰어다니고 굴러다니며 즐길 수 있었다. 우리와는 달리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하였고 동반한 자녀도 너무 어리지 않다면 문화해설사의 설명 시간에 맞추어 방문하시기를 추천한다. 손주를 보러 오셨던 나의 부모님은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을 하셨는데, 쉬운 설명으로 재미있는 뒷이야기들도 함께 들을 수 있어 매우 만족해하셨다.
강릉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곳 중 하나는 오죽한옥마을이었다. 이곳은 강릉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한옥마을 형태의 숙박시설로, 오죽헌과 이어져있다. 언니가 강릉에 놀러 왔을 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머물렀던 적이 있다. 아이의 어린이집도 마침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기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언니와 강릉 시내에 놀러 갔다가, 저녁에는 아이를 재우고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배경으로 대청마루에 앉아 와인을 마셨던 밤하늘의 낭만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시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그런지 내부 시설도 깨끗하고 정갈하며 요금도 합리적이다. 낮에는 아이와 잔디밭을 뛰어놀고, 한옥을 구경시켜주고, 연못의 금붕어들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투호, 그네 타기, 씨름판 같이 전통놀이들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주변이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어 밤에는 별이 제법 잘 보인다.
오죽헌과 한옥마을의 바로 근처에는 강릉에서 우리 가족이 가장 자주 갔던 식당인 OO키친이 있다. 테라스 좌석이 있어 아이와 단 둘이 방문하기에도 부담이 없는 곳이었고, 직원 분들도 한결같이 친절하고 따뜻했다. 수도권의 프렌치 레스토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못지않게 정갈하고 맛있는 프랑스 가정식을 먹을 수 있었던 곳이다.
이 장소들은 모두 경포호수 인근에 몰려있어 자연스럽게 서로 연결되는 공간들이다. 아마 주말 동안 잠깐 강릉에 놀러 오는 일정이라면 이곳들만 즐기더라도 시간이 촉박할 수 있다. 강릉에 가족과 함께 놀러 오는 친구들에게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추천해주곤 했었다.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은 강릉이 낳은 또 한 명의 조선 3대 여류시인 중 한 명인 허난설헌과 그의 오빠이자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인 오죽헌은 상당히 정갈하고,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느낌이라면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는 그에 비해서는 작고 웅장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좀 더 거친 느낌이 있다. 지금 남아있는 생가터의 모습들이 그 생애가 자주 비교되는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삶의 궤적과도 통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곳에서도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신청하면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두 여성의 대조되는 삶과 가족사에 대해 쉽고 재미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명문가에 태어나 충분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 조선 사회에 여자로 태어나 결혼을 하면서부터 시작된 허난설헌의 불행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되풀이되지 않고 있다 단언할 수 있을까. 반면, 신사임당은 혼인 후에도 세도가였던 친정에 머무르면서 율곡 이이를 키웠고, 율곡을 추대하려는 정치적 세력에 의해 부각되었고,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어느 영부인의 현모양처 이미지를 위해 다시 한번 정치적으로 소비된다. 최근 들어서는 잔재하는 유교적 가치관에 저항하는 여성의 가치관이 존중받기 시작하면서 허난설헌의 굴곡진 삶은 재평가의 대상이 되면서도 상대적으로 현모양처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진 신사임당은 평가절하를 당하기도 한다. 그녀들은 오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삶이 후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시대에 따라 재평가되고, 귀감이 되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소비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이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아이는 숨바꼭질 을 하기에 제격인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의 소나무 숲을 뛰어논다.
아르떼뮤지엄은 코엑스에 아티움 전광판에 초대형 파도 아트로 유명세를 탄 디지털 미디어아트 회사에서 개관한 상설 디지털 아트 뮤지엄이다. 꽃, 파도, 동굴, 해변, 등 총 열두 개의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 자체도 나에게는 충분히 신선하고 강렬했다. 시각적, 청각적 자극이 아주 화려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예술에 대해 보수적인 누군가는 말초적이라거나 테마파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관람을 하고 나면, 첨단의 기술과 규모로 관객을 압도하고 미술관 방문에 대한 대중의 진입장벽을 낮추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도전으로써의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garden 관은 아주 넓은 복도식 관람 공간에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작품들과 강원도의 사계절이 30분 넘게 전시되기 때문에, 무더운 여름날에 강릉시민 요금으로 반값만을 내고 아이와 단 둘이 쾌적한 시간을 보내며 눈앞에서 사계절이 펼쳐졌다 사라지는 진기한 광경을 바라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아르떼뮤지엄이나 그 인근에 놀러 간 날에는 아르떼뮤지엄 건물 뒤에 있는 카페A를 자주 방문하곤 했다. 계단식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정면의 통유리를 너머 경포천과 경포천 너머 허균허난설헌공원의 웅장한 소나무 숲을 눈에 꽉 채워 담을 수 있는 구조이다. 계단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지만 좌석과 찻상은 모두 나무와 전통 교자상으로 배치하여 대조적이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역시 관광객이 많은 시간을 피해 아이와 방문하곤 했다. 주로 강릉밤:바다라는 에스프레소 콤파냐 메뉴를 주문하곤 했는데, 생크림 대신 달콤한 밤크림과 견과류 조각을 올려주었고 에스프레소의 맛을 더 음미할 수 있게 함께 할 탄산수도 함께 제공해준다.
그리고, 경포아쿠아리움이야 아이와 방문했을 때 절대 실패할 일이 없는 곳! 한국 수달과 펭귄도 볼 수 있다. 서울에 있는 다른 아쿠아리움에 비해 더 작은 공간이지만 가성비 훌륭하고, 성수기 주말을 피하면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고, 실외에서도 아이와 놀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 곳이다. 어른들도 아이들과 함께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공간. 아쿠아리움 바로 옆에는 지난 글에서도 언급하였던 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와 이젠놀이터가 있다. 이 공간에서는 로컬푸드마켓 등 아기자기한 지역 행사들이 열리기도 해서 지역사회의 젊은 소상공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아르떼뮤지엄이 있는 부지에서 길동이를 따라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경포호수공원까지 흘러들어 가기도 한다. 봄이면 벚꽃으로 화사해지는 이곳. 밤에는 커다란 달덩이 옆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가시기를 바란다. 매일 경포 호수를 산책할 수 있는 강릉 시민 여러분, 부럽습니다. 강릉, 그립습니다.
경포생태저류지는 오죽헌과 선교장 사이의 저류지이다. 경포호수 하천 폭리가 좁아 집중 호우 때 발생하는 침수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조성한 저류지라고 한다. 집에서 아주 가까웠고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먼저 집 근처에 생태저류지의 존재를 확인하고 저수지가 있는가 보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멋들어진 메타세쿼이어 길로 눈길을 끄는 멋진 산책로였던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는 추억이 많은 곳이다. 이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신나게 뛰고, 돌멩이를 줍고, 던지고, 길가에 핀 민들레 씨를 구경했고, 웨딩촬영을 나온 커플과 사진촬영팀을 응원해주고, 산책 나온 동네 강아지들과 인사했는데. 가을에는 코스모스 꽃도 감상할 수 있다는데, 가을의 강릉을 즐기지 못하고 밴쿠버에 오게 된 것이 아쉽다. 생태저류지를 방문할 생각으로 강릉에 여행을 오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오죽헌이나 선교장을 방문할 때 생태저류지 산책로를 산책하면서 잠시 바람을 쐬기에 좋을 장소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