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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월 Apr 01. 2024

8천 겁을 쌓은 인연, 그리고 나

패스트 라이브스 (Past Lives) 2023

2023년, A24 제작사의 더 웨일을 극장에서 두 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두세 번 보았을 무렵 나는 4월에 추운 강가에서 추천받은 넷플릭스 시리즈 BEEF 성난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A24 제작사의 미장센, 가사 하나 없지만 감정선 하나하나 다 전해지는 배경음악, 필름 카메라로 찍은듯한 향수 어린 특유의 색감, 그리고 각기 다르게 전해지는 대사의 의미들이 참 좋았다. 패스트 라이브스가 개봉된다는 사실에 나는 오매불망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렸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개봉일이었던 작년 여름엔 미국에만 몇 안 되는 극장 개봉 소식에 많이 실망했다.


2023년 12월쯤 두바이로 가는 비행기에서 에미레이트 항공의 석유 머니로 이 영화를 항공에서 접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피곤해서 초반에 보다 잠들어버렸다. 그렇게 다시, 언젠간 다시 맨 정신으로 보리라 다짐했다.


2024년 3월 6일, 패스트 라이브스는 한국에서 개봉을 했다. 한국을 주제 삼아, 한국 감독의 데뷔작에, 한국인들이 나오는데도 영화는 일 년이나 늦게 오스카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오르고 난 뒤에나 개봉했다. 이 사실이 어이없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개봉해 준 것에 고맙다.


심야로 본 패스트 라이브스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해석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kA244 xewjcI? si=hNSmb3 CWh-U1 pt0 w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영화는 주인공 나영 (Greta Lee)의 관점에서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남자주인공 해성 (유태오)과의 인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는 전생이라는 주제로, 현생에 부부가 된다는 것은 8천 개의 인연의 겁을 쌓은 관계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명시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겁'이란 우주가 창조되고 멸망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이 인연을 '겁(劫)'으로 표현한다. 겁이란 연, 월, 일이나 시간의 단위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뜻한다. 1겁에서 1만 겁의 시간을 지나 이어진 인연은 평생 단 한 번의 만남이라 굉장히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출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ㅣ 8000겁의 인연|작성자 에코칩코


다만 나는 이 영화의 해석을 나영과 해성과의 관계만이 아닌, "나"라는 아이덴티티를 갖고 살아가는 주인공인 나영이의 삶에 대한 해석을 하고 싶다. 영화는 몇 가지의 장치로 나영이가 어떻게 본인이 삶의 주최가 되어 살아내는지 그린다. 이민자로서 나라는 사람을 재창조하되, 자신 고유의 특성과 뿌리를 지켜내는 삶은 어떤 것인지 은유적으로 보인다.


1. 이름

12살, 초등학생 나영이는  가족이 이민을 준비하는 과정에 시작으로 영어 이름을 고른다. Nora.

자칫 동생의 이름을 뺏을 뻔했지만 엄마의 중재로 그녀는 본인의 새로운 자아를 찾듯 새 이름을 찾아 캐나다로 여정을 떠난다. 그녀가 두고 가는 사람은 초등학교 첫사랑 해성.


해성이와의 첫 데이트에서 나영이의 엄마는 말한다 "버리고 가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겠죠."


이민자의 삶 속에서 이름을 새로 갖아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겠다. "너 OO이 알아?"라는 질문에 이름 하나 다르면 알던 사람도 모르는 사람으로 답한다. 그렇게 나영이는 해성이를 두고 캐나다로 떠난다. 어쩌면 나영이는 "나영이"를 두고 한국을 떠난다.


2. 선택

Nora는 우연히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이 닿은 해성이와 12-3시간 미국과 한국 간의 시차를 극복한 채로 밤낮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녀는 연극 작가의 꿈을 안고 뉴욕에서 성공을 꿈꾸고 있지만 매일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알아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는 이렇게 힘들게 미국에 정착한 이상, 본인이 무언가를 일궈내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없다 단언한다. 그녀는 그렇게 해성이에게 연락을 잠정적으로 끊기를 고한다.


10년이 넘는 시간만에 설레는 감정으로 휩싸이기 무렵, 그녀는 누군가를 원하는 감정보다 본인이 이뤄내고자 하는 목표를 선택한다. 본인의 꿈을 위한 선택 말이다. 영화 초반부에 심어둔 이러한 장면을 통해 Nora는 어떤 사람인지 큰 힌트를 준다.


3. 정체성

그렇게 해성이와 연락이 끊긴 채 그녀는 아티스트들의 영감에 원천인 아티스트하우스로 떠난다.


공용 숙소임에도 각기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임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장면하나가 있다. 바로 Nora가 본인 이름이 새겨진 컵을 손에 쥐고 테라스에 나와 있는 장면이다. 이는 그의 미래 남편인 Arthur와의 첫 만남을 그린 장면이기도 하다.


아티스트 하우스에서도 그녀는 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컵을 챙겨 간다. 손에 꼭 쥔 컵처럼 그녀 본연만의 정체성을 쥐고 있음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비록 그녀는 그녀가 바라는 토니상을 탈 수 없을지라도 Arthur와의 결혼을 통해 그린카드를 쥐게 되었고, 시간은 야속하게도 많이 흘러갔다. 해성이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어느 날, 해성이의 비가 내리는 뉴욕행 여행덕에 그들은 20여 년 만의 재회를 한다.


"와... 너다."

무수한 다른 단어들보다 너라는 단어가 그간에 숙성된 많은 감정들과 생각을 전한다.


밤마다 한국어로 잠꼬대하는 나영이는 한국어가 많이 서툴지만 그녀가 진정 편안했던 곳, 편안한 곳에 대한 그리움을 느낀다. 해성이가 그리웠던 만큼 나영이는 그간 돌아가지 못했던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묻어난 게 아닐까. 그들은 공원을 거닐고 요트를 타며 그동안 나누지 못한 밀린 대화들과 웃음을 주고받는다.


다음날 저녁, Arthur 나영 그리고 해성은 바를 간다. 무수히 흐르는 명대사의 향연 중에 해성이와 Nora는 말한다.


"너는 떠나는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했나 봐." 


"네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근데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네 앞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떠나는 사람은 곧 이민자의 삶이 아닐까.

정말 나영이는 떠나는 사람이고 싶었기에 해성이를 떠났을까.

그래서 그들은 이번이 8천만의 겁이 아닌 8천 중 하나의 겁이 된 걸까.


공항으로 가는 우버를 위해 둘은 나란히 길을 걷는다. 해성이가 떠난 자리에서 나영이는 잠시 머물다 집으로 돌아간다. 미국의 집 말이다. 그렇게 미국의 집은 그녀의 집이 되어버린 것이다.


함께 걷던 길을 카메라가 따라갈 땐 짧게만 느껴지던 순간이 나영 혼자 돌아가는 장면은 길게만 느껴진다. 그 끝엔 그녀의 미국 남편인 Arthur이 기다리고 있지만, 나영이는 이윽고 복잡한 마음의 눈물을 터트린다.


이는 그녀만의 이민자로서 지켜내야만 했던 본인의 정체성과 꿈,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버려야만 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터이다.



그녀였기에 그리고 그녀여야만 했기에, 그녀는 그녀일 수 있었다.

그러기에 해성이에겐 나영이가, Nora에겐 해성이가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인연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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