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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Jul 18. 2024

격투 예찬-국대출신과의 스파링 후기

마흔 살의 복싱일기 -17

  올해들어 가장 충격적인 9분을 보냈다. 어제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가대표 선수 출신과 스파링을 하게됐다. (아직도 두근거린다.) 사실 존함이라도 물어봤어야 했던 것 같은데, 지난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한 적이 있는 여자 복서 분이라고 했다. 물론 그런 위대한 분이 날 위해서 시간을 내주신 건 아니었다. 체육관 코치님과 두 분이 훈련 중에 혼자서 놀고 있는 내가 좀 딱해보였는지 매스 스파링을 먼저 제안해주셨다.     


국대출신과의 스파링이라니?!!!


  링이 울리기 전 호흡을 올리며 머릿속으로 온갖 설레발이 오고갔다. 공격? 전술? 모두 언감생심. 

  오직 생각 하나가 또렷이 맺혔다.      


“제대로 맞아보고 싶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여자에게 맞고싶어 안달난 아저씨라니. 변태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복싱을 해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당장 처음 붙어보는 상대만 만나도 기분이 묘하게 달아오르는데 내 경우 나보다 체격이 작은 상대, 혹은 여성 복서와 스파링을 해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국가대표를 하셨다고 하지 않는가! 미트칠 때마다 총알 터지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돈 주고도 맞아보기 어려운 상대와 9분을 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에너지 목격담


  3라운드가 끝났다. 나의 기대가 무색하게 모든 주먹을 다 끊어주셔서 제대로 맞아보질 못했다.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좀 더 세게 들어와주셔도 됩니다’ 하고 부탁을 하고 부탁을 했는데 야멸차고도 번개같은 주먹은 내 눈앞에서 딱 멈췄다. 바디에 한 방 제대로 들어왔을 때도 분명 더 파고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슈욱 하고 김이 빠지며 주먹이 멀어졌다. 물론 제대로 맞았으면 병원에 누워있었을 수도 있겠지만...아쉽고 아쉬웠다.   

  

  그런데 기대치도 않았던 감동이 있었다. 그(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어린 시절 숨을 멎게 했던 영화들의 그런 강력함처럼 내 눈을 사로잡았다. 탱탱볼처럼 튀면서도 농구공처럼 묵직한, 거대한 추가 신속하게 움직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느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는, 진심으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요리사가 온 힘을 다해 평생의 수련으로 내 앞에 내놓은 스시 두 점에도 뭉클하는 게 사람 아닌가. 아마도 (거의) 평생을 운동에 매진한, 그러므로 그 시간동안 수련된 몸의 움직임에는 그저 작은 체구의 한 인간이 아닌 아주 오랜 노력과 마음가짐만이 담을 수 있는 에너지가 있었다.      


격투라는 아름다움


복싱을 시작하기 전에는, 으레 펜대 굴리며 커온 모범생이 그렇듯- 모든 운동 선수나 종목에 대해 약간의 편견이 있었다. 격투기는 더했다. 어릴 때 유행했던 K-1이나 프라이드, 나아가 UFC같은 걸 보며 열광하는 관중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게 그저 특정한 종류의, 내가 친해질 수 없는 남성들의 ‘허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글러브를 끼고 맞고 때리며 알게된 건, 운동 그중에서도 ‘격투’는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행할 수 있는 최후의 격렬한 몸짓이기에 거짓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허세와는 가장 거리가 먼 운동이다. 특히 격투기를 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지하지 않으면 결코 배울 수도 링 위에 오를 수도 없다. 언제나 나보다 강한 상대가 있고 내게는 언제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이 운동을 할 수 있다. 세계챔피언도 격투시합 중에는 하수에게 럭키펀치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수 있다.     


원초적인 인간이 되기 위하여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몸으로 싸우며 살아왔다. 그게 사냥이든 전쟁이든 무엇이든. 그리고 매 순간 목숨을 걸고 격렬했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거짓의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평화 속에 인간은 상상을 한다. 물론 좋은 일이다. 다만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면, 원시의 투쟁 속에 싸우는 인간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이 먼저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몸으로 싸우는 방법을 잊지 않으면 그래서 조금은 더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인간답게 늙어가기 위해 오늘도 복싱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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