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의 복싱일기
마흔까지 열심히 살고 나니, 인생이 묻는다.
자, 이젠 어떻게 할거야?
잠시 외면하고 휴대폰을 열면 그 안엔 더 시끄러운 질문과 질타가 가득하다.
유튜버들이 말하는대로 '경제적 자유'를 누려볼거야?
그러려면 지금의 안락한 집을 빨리 팔고 '갈아타기' 해야하지 않겠어?
비트코인도 안 사둘거야?(맙소사!! 루저!!)
일은? 지금 직장은 AI시대에 안전해?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 거 같아?
넌 이제 야망이 없나?
공부하고 취업해서 일하고-의 대한민국 일반인의 평범한 한 라운드는 의외로 금방 끝나고(아주 힘들었는데...)
야속하게 새로운 라운드 종이 울린다.
마흔. 띵.
매일 그런 질문을 안고 살며, 매일 복싱장에 가다보면 그곳에서 답을 찾곤 한다. 요즘은 스파링 횟수가 많아지면서 조금씩 실력이 는다는 기쁨도 맛볼 수 있지만 동시에 정체되어간다는 생각도 든다. 마흔의 위치처럼. 인생이 익숙해져 안도감이 들다가도 곧 지루해질 거라는 (혹은 비루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함께 온다. 한동안 비슷한 수준과 느낌으로 스파링을 하던 내게 코치님이 하나의 제안을 해주셨다.
"라운드별로 컨셉을 잡아보세요."
물론 스파링할 때마다 그럴듯한 작전을 세우곤 한다. 이번엔 잽잽투로 들어가보자, 이번엔 셔플로 사이드를 파보자 이번엔 투를 기다렸다가 카운터를 쳐보자. 작전이라기보단 혼자만의 창대한 계획에 가깝지만, 이런 단순한 하나의 움직임도 사실 링 아래서 많은 연습을 하지 않으면 링 위에서 3분 동안 한 번 나오기도 어렵다. 코치님이 말한 '컨셉'은 조금 다른 거였다. 한 번의 기회를 노려보는 게 아니라 3분을 관통하는 태도를 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 라운드에서 어떤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가"
작은 작전이나 드릴만 머릿속에 두는 게 아니라 나는 '어떤 복싱'을 하는 사람인지 정해두고 라운드마다 바꿔보라는 말.
어떨 때는 아웃 복싱으로 거리만 잡아가다 잽으로 점수를 따는 컨셉이 되어보기도 하고 다음 라운드는 '닥돌'하며 더킹과 훅으로 맞으며 들어가보기도 했다. 또 어떨 때는 '이번 라운드는 그냥 맞아보자'고 풀 가드로 상대를 밀고 안기는 것만 반복해보기도 했다. 실제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겠지만, 그냥 나 스스로 이번 라운드는 로마첸코, 다음 라운드는 이노우에 나오야, 그런 식이다.(진심으로 생각한 건데 쓰고보니 너무 웃기다)
그랬더니 스파링을 마치고 나면 늘 약간의 스탯이 한 방향으로 더 찍히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목표하고 정해놓은 게 있기에 맞고 때리고와 상관없이 늘 '내가 리드한다'는 느낌의 라운드를 가질 수 있었다. 리드하면 기세가 생긴다. 기세가 있어야 이기든 지든 3분을 즐길 수 있다.
사실 '나'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복싱이라는 게 한계도 명확하고 형태도 어느정도 정해져있을 것이다. 나이가 한참 들어 시작한 운동이라 발전 속도나 변화의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다만 마흔이 넘어 링 위에 올라가며 코치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나름의 관록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게 늘 내가 '먼저' 컨셉을 잡아야 하는 일이다. 다만 그동안 해봤던 '모범생'이라는 컨셉도 '일 잘하고 열심히하는 직원'이라는 컨셉도, 내가 스스로 택했다기보단 어느 순간 으레 당연히 그래야 해서 잡힌 태도다. 그러니까 (누군지 모를) 내 인생의 감독이 디렉팅해준 내 캐릭터랄까.
그래서 난 마흔 살부터의 내 컨셉을 정해두기로 했다.
지금의 나는 '나와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서포터'다. 주연이 아니고, 조연이다.
아들이 여덟 살이 되고, 아내가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 나의 가정- 이들이 건강하고 즐거우면 무엇도 바랄 게 없는 지금의 나는 사실 돈을 왕창 더 벌어야 한다는 컨셉도, 좀 더 내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야 한다는 간절함도 불필요하다. 오히려 독이다. 그런 동력과 자극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한때는 혐오하기도 했다. 그땐 세상이라는 링에서 나홀로 분투하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주어진 '링'은 가족이다. 가족을 처음 이뤘던 30대 초반에 좀 더 일찍 이런 마음을 품었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땐 욕심이 남아있었다. 이제서야 그 욕심과 용기있게 멀어져보려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리고 건강하고 젊은 이 시간에, 내가 그들을 지지하고 있어줄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허락된다면- 그것보다 남은 내 삶을 윤택하게 해줄 것이 있을까.
아이의 등교 가방을 싸고, 요리 유튜브를 보며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내 옷이 아니라 주방용품을 쇼핑하면서도 그것이 지금 내가 정한 내 컨셉이기에 초라하거나 어딘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누구는 '퐁퐁남'이라고 하던데, 누가 뭐라든 어떤가. 혹은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의 한 챕터를 정신승리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신승리면 어떤가. 승리라는 게 중요하지. 그렇게 쉰 살까지 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