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의 복싱 일기
1985년 대한민국 출생.
아버지는 술을 가까이 하시는 분이었다. 술에 잡아먹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좋을 리 없다. 다만 그렇게 오랜 세월 취한 밤을 맞이하셨을 때도, 내 몸에 단 한 차례의 손찌검도 하신 적이 없다. 감지덕지라기보단, 난 그게 아버지의 타고난 성정임을 이해할 나이가 이제 됐다. 마음이 정말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없다.
1998년 대한민국 중학교.
아버지의 아들이니 나는 마음이 약했다. 몸도 약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 140cm가 되지 않았다. 마침 어촌에 있는 중학교라 아이들은 모두 커다랗고 시커먼 몸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 중학교였다. 갈색 교복을 입은 작은 내가, 커다란 아이들 수십 명 사이에서 지냈다. 쉬는 시간마다 싸움이 일어났고 지금 생각해봐도 꽤 무서운 싸움들이었다. 커터칼과 피가 난무하기도 했다. 누구도 그 싸움을 말리지 않았고 복도에 까까머리 수십 명이 모여 친구를 응원하곤 했다. UFC가 따로 필요없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싸움의 틈바구니에 낄 자리가 없었다.
싸움의 세계가 펼쳐지는 복도를 벗어나면-그러니까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은 복도였는데- 조용한 교실이 있었다. 교과서가 어지러진 채 아무도 없는 교실의 조용함을 좋아했다. 마땅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닌데 난 그곳에 남아 공부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놀이를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긴 어려웠다. 두세 명이서 수다를 떨며 웃어젖히는 정도의 취미는 누구와 공유하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놀리고 따돌리기 좋은 이상한 취향이었다. 아이들에게 손쉬운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내 세계의 중심인 교실을 지키기 어려웠고, 나는 종종 복도도 아닌 학교 뒤편으로 끌려나갔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아이들에게 혼이 났다. 얼마나 어떻게 맞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기억나는 건 내가 매를 벌었다는 사실이다. 고분고분 맞으면 될 걸 꼭 대들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고자질하는 건 또 남자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혼자서 묵히며 개겼다. 어느 날 서울에서 1년을 꿇은 친구가 전학을 왔다. 그 아이는 수다떠는 걸 좋아했다. 세상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때서야 폭력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는 그 아이가 하늘이 나를 가엾게 여겨 내려준 평생의 보물이라고 생각했다.
2001년 대한민국 고등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마찬가지로 남고였다. 비평준화 지역 남자고등학교. 1990년대였지만, 그곳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와 다를 게 없었다. 아이들끼리 싸우거나 소위 '비공(식써클)'들이 있어 패거리로 몰려다녔지만, 오히려 중학교 때보다는 다툼이 적었다. 어쨌거나 공부를 잘 하는 학교였고 덩치가 커진 아이들은 서로 사력을 다해 싸우길 주저했다. 그러자 선생님들이 매질을 시작했다.
선생들의 매질은 수위도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야구방망이 양면을 잘라 노처럼 만들어 아이들을 때리는 화학 선생님이 있었다. 고환 아래쪽을 세게 꼬집어 모욕을 주던 영어 선생님. 키가 아주 작은데 그래서인지 그냥 붕붕 귀싸대기를 날리곤 했던 문학 선생님. 교도소 간수 출신답게 한 번 화가 나면 시계를 풀고 정말 개잡듯 아이들을 때렸던 사회 선생님. 나는 이들의 몽타주와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 선생들은 모두 교과서를 또박또박 잘 읽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면 교정 전체에 아이들 매타작 소리가 팡팡 울려 퍼졌다. 내가 많이 맞는 쪽은 아니었지만 공포의 공기는 너무나 무거웠다. 중학교 때 나를 구해준 친구도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1학년 중반에 가출을 감행했다. 친구는 여전히 멋졌고, 나는 무엇도 못하고 그저 가방 가득 교과서와 문제집을 싣고 학교와 집을 왔다갔다 했다.
대학교 진학은, 그러니까 중고등학교 6년의 폭력에서 해방된 기념일이었다. 누구도 나를 때리지 않을 게 자명한 세상. 말과 글로 소통하는 당연한 세계. 물론 그곳에도 여러 아귀다툼이 있었지만 괜찮았다. 곧 입대를 해야 한다는 사실 빼고는. 뒤에 올 불행을 예감이라도 했던 건지 입대를 최대한 늦췄다. 4학년이 되어서야 공군에 입대했다. 물론 편하려고.
2007년 대한민국 군대.
공군은 훈련소와 특기학교 성적으로 특기부여 및 자대배치를 받는다. 나는 1500여 명의 훈련병 중 전체 2등을 했다.(인생 최고점) 관제병으로 특기를 부여받았고, 특기학교 성적과는 상관없이 내가 가고자 하는 부대에 갈 수 있었다. 나는 여러 전투비행단을 피해 편해보이는 시골의 작은 부대를 선택했다. 모두가 부러워했다.
자대배치 첫 날, 내무반에 각잡고 앉아있는데 담배 피우는 사람 거수! 라고 말했다. 거수했다. 한 대 줄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갔다. 슬리퍼에서 끌리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바로 쪼인트를 맞았다. 학교는 하교라도 할 수 있지 군대는 도망갈 데가 없다. 밥먹고 양치하고 담배피고 일하고 티비보고 화장실가는 것도 다 같이한다. 게다가 옆자리에서 자야한다. 그마저 새벽이면 일병 선임이 툭툭 깨웠다.
일선(일병 선임) 아래 보일러실 집합
내무반 아래 보일러실은 보일러 소리로 아무 것도 밖에서 들리지 않는다. 불을 꺼놓으면 안에 있어도 사위 분간이 전혀 안 된다. 그곳에 언 자세로 서서 온갖 욕설을 동생들에게 들었다. 이유야 구차해서 적지 않겠다. 그런 일들에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늦게 군대에 온 만큼 무어라도 해서 나가야 핸다는 생각이 절박했다. 그 흔한 토익 시험 한 번 안 본, 자기계발 시대의 대학교 4학년이었다. 새벽이면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했다.
주말 오침 시간이었다. 군대에선 낮잠을 강제로 자야한다. 그런데 이병은 잘 수 없었다.(왜?) 3시간을 각잡고 앉아있어야 했다.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옆에 선임들이 누워 잠을 자거나 과자를 먹을 때 책을 보기 시작했다. 소문이 났다. 불려가서 맞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책을 봤다. 어느 날은 관물함에 들어가서 손전등을 키고 책을 봤다. 또 맞고 다시 책을 봤다.
맞았지만, 책을 봤으니깐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나니 맞는 게 별 게 아니었다. 책을 펼치면서 많이 맞을 수도 있으니 많이 읽어두자, 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국방부의 시계는 거꾸로 가지 않는다. 맞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는 고참이 되었다. 군대에서 리스트를 만들어, 230권의 책을 읽었다. 2007년이면 꽤 예전이기도 하지만 또 그렇게 아주 옛날은 아니다. 요즘 군대 편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나는 경계한다. 군대는 그 존재 자체로, 폭력으로만 유지되는 조직이다. 그것이 물리적이냐 아니냐는 사실 크게 중요치 않다. 그게 아니라면 왜 전쟁도 하지 않는 군대에서 아이들이 죽어나가겠나.
2024년 서울.
제대한 뒤론 맞은 적이 없다. 지지리도 운 없는 폭력의 역사가 대충 끝나가는 것 같다. 다만 복싱장에서 스파링을 하다보면, 실력과 상관없이 싸움의 기세 자체가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게 나쁜 일이란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애초에 사람을 때릴 수 있는 신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내 경험이다. 지금도 나에겐 그게 없어서 곤욕을 치르곤 한다.
그러고보면 40년의 폭력의 역사 속에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때리거나 이겨보지 못했다. 맞았으니 나는 선량한 피해자고 때린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긴 시간을 버티고 오늘도 링에 오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 붙으면 다 이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