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듯 우리 부부도 언젠가 외국에서 살아 보기를 꿈꿨다. 휴가철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여기 살면 어떨까?’, ‘어디에 제일 살아보고 싶어?’와 같은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다. 그런 대화는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긴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주곤 했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자연스럽게 그 시기가 아이의 취학 전후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일년살이를 하게 된다면 서연이가 학교 들어갈 즈음이 좋겠지?’, ‘육아휴직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가능하니까 여덟 살 전후로 떠나는 게 좋겠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젠가 정말 그 꿈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자주 설렜다.
학생 때 만나 결혼 후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던 우리는 10년이 넘는 시간 한 회사에 소속되어 일해온 맞벌이 부부였고, 운 좋게도 빠르게 승진해 제법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안정적인 현실의 궤도를 벗어나 해외에서 일 년 살기와 같은 도전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결혼할 때 했던 일 년 살기의 꿈은 멀어져 갔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우리의 매일은 여전히 바빴고, 삶의 루틴은 더 타이트 해졌다. 매일 아침, 아이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9 to 6로 하루를 꽉 채워 근무를 하고 나면 일상의 많은 숙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밥을 지어먹고, 빨래를 돌리고,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개 두 마리의 산책까지 시키고 나면 자정이 가까운 시간, 다음날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었지만
한 주가 지나 무얼 했는지 돌아보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던 일상,
계절의 변화를 모르고
겨울을 맞이하던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그거 말이야,
우리 일 년 살기 하기로 했던 거
이제 준비해볼까?”
남편은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 미국에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기에 미국 대학의 석사과정 이수를 위한 입학 준비를 해보겠다고 말했다. 학교마다 요구하는 조건은 달랐지만 합격을 위해선 영어점수와 에세이 그리고 인터뷰 등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해외 일 년 살기를 위해 나이 마흔을 목전에 두고 늦깎이 학생이 되기로 결심한 남편은 그날 이후 몇 달간 집 앞 독서실로 퇴근해 영어점수를 올리기 위한 공부를 했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됐다! 이제 우리 갈 수 있어.” 해외 일 년 살기를 위해 학교 입학을 하게 되었지만 이왕이면 좋은 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의미 있는 시간을 쌓길 원했던 남편은 바라던 학교인 USC 석사과정의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그 무렵 뉴스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남편의 학교에서는 전면 온라인 수업 전환을 발표했고 동시에 미국 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코로나로 인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부를 위해 입국하고자 하는 유학생에게도 입국 제한 조치를 적용하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허무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해외 살이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1년간 남편의 학교 입학을 보류해 두고 해외 일 년 살기에 대한 꿈도 접어 두었다. 그러나 몇 달간 자신과 싸워가며 힘겹게 자격을 만들었던 남편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계속해서 코로나 상황에 대한 뉴스를 주시하며, 영국으로 호주로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끝내 영국과 호주에 위치한 학교까지 지원해 합격 자격을 만들어 두었지만 코로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한국에서의 일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몇 번의 계절이 더 바뀌었고 아이는 초등학생 2학년이 되었다. 회사 규정상 육아휴직은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이거나 만 8세일 때까지만 사용이 가능했기에 보류해 두었던 학교 입학을 실행에 옮길지, 계속해서 한국에서의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갈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코로나 상황은 1년간 지속된 끝에 백신 공급이 진행되고 있었고, 접종률 또한 늘어가고 있었다. 몇 달 새 또다시 상황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바뀌며 유학생 입국 또한 허용으로 전환되었다. 학교에서는 전면 온라인이 아닌 부분적인 대면 수업이 병행될 거라는 소식을 전해왔고, 돌아오는 2022년 1월 학사 일정에 맞춰 입학을 할 것인지 알려 달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모든 상황이 1년 전보다는 나아진 듯 보였다. 앞으로만 달려가던 일상을 멈추고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해외 살이의 꿈을 실행에 옮긴다면 지금 보다 더 완벽한 때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자 안정적인 생활을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특히 아이를 낳고 1년간 육아휴직을 했던 경험이 있던 나로서는 일정 시간 부재 후 회사에 복귀했을 때 당면해야 했던 불안정한 상황들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남편은 그런 나의 반응에 당황했다. 오래전부터 함께 논의해왔던 일이고, 수개월에 걸쳐 어렵게 준비한 상황이었는데 결정의 순간, 망설이는 내게 서운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학교 입학을 위한 결정을 앞두고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우리는 함께 떠나기로 했다.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커리어의 단절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결국 온 가족이 다 함께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고민의 시간이 무색하게
결정의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떠나지 않으면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해외살이에 대한 미련이 남을 것이었다. 커리어에 구멍이 생길 수 있고, 복귀 후 재적응을 위해 고단한 시간 또한 맞닥뜨릴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 보내게 될 다양한 경험과 충전의 시간은 값질 것이었다. 2021년 10월, 많은 고민 끝에 출국을 하기로 결정한 시점 한국에서는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