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구루 Sep 21. 2022

우리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Part2. 여행자의 시간 I : 겨울에 떠나는 미국 서부 로드 트립


 

다음 숙소로 가기 위해 엔텔로프 캐년을 뒤로하고 30여분을 달렸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 보였는데 갑자기 사방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2시간 정도만 더 달리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기에 별 일 있겠나 생각하며 좋아하는 노래를 번갈아 듣고 있었다. 도착 30여분을 앞두고 특정 구간에서 길이 심하게 막히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앞서가던 차들이 모두 유턴을 해서 돌아오고 있었다. 돌아오던 차량들 중 반대편 차량의 한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더니 그랜드 캐년으로 가는 길이 폭설에 막혀 폐쇄되었다는 말을 전해왔다. 눈발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구글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자 다른 경로를 하나 더 찾을 수 있었다. 힘들게 달려온 길에서 다시 3시간 30분을 더 달려야 했지만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만 있다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곳엔 예약해둔 숙소도 없었고, 다시 호간에서 하루를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마다 예약해둔 숙소와 계획된 일정이 있었기에 오늘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면 남은 일정이 모두 틀어질 수 있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에 의지한 채 다시 핸들을 돌렸다. 그런데 점점 더 거세지는 눈보라에 목적지까지의 시간은 3시간에서 4시간으로, 다시 5시간으로 계속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차의 앞유리로 무섭게 쏟아지는 폭설이 시야를 가려 앞을 분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걸 블리자드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다른 차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길 위엔 우리 차와 앞서가는 다른 차량 한 대뿐이었다. 앞 차량의 빨간 불빛에 의지한 채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계속해서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앞의 차가 리드하는데 지치면 차례를 바꾸어 우리 차가 앞서 리드를 했다. 서로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동지애를 느끼며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한 채 한참을 나란히 달렸다. 그러다 앞의 차량이 깜빡이로 자신은 곧 다른 길로 빠진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깜빡이로 신호를 보내온 지 얼마 후 앞 차량은 우측으로 빠지며 자기 행선지를 찾아 떠났다.



<앞 차량의 불빛에 의지한 채 칠흑같은 어둠 속을 달리던 밤>


 

이제 어둠 속엔 우리 차만 남아 있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의 도로를 우리 차만 달리고 있었다. 여전히 거센 눈발이 시야를 가려 도로 옆이 낭떠러지인지 골짜기인지조차 구분할 수 조차 없었다. 끝도 없이 휘날리는 눈발 속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한 채 어둠 속을 달리는데 매서운 눈발을 뚫고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무섭고 겁이 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인터넷마저 끊겨 내비게이션마저 불통이었다.

 


남편은 몇 시간 채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핸들을 붙들고 있었고, 나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도로 위 표지판이 보이면 우리가 맞게 가고 있는지 경로를 확인했다. 잠에선 깬 아이도 무서웠는지 평소처럼 재잘대지 않고 숨죽여 창밖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아이가 외울 줄 아는 노래를 하나하나 부르는 사이 내비게이션이 연결되었고 목적지까지의 시간이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엔텔로프 캐년을 떠나 다시 운전대를 잡은 지 장작 8시간 만에 숙소를 목전에 둘 수 있었다.

 


목숨 걸고 달려온 8시간, 고생 끝에 호텔에 도착해 주차를 하려는데 하필이면 경사진 언덕 위에 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강이까지 쌓인 눈에 차는 언덕을 오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결국 내가 먼저 아이와 개들을 데리고 호텔로 들어가고 남편은 인근 호텔이 아닌 마을 어귀 평지 주차장에 차를 세운  거센 눈발을 뚫어 10여분을 걸어서야 호텔로 돌아올  있었다. 입고 있던 옷과 운동화, 양말까지 모두 젖은 상태였다. 숙소로 들어온 남편이 “처음으로 이번 여행이 후회된다.”라고 말했다. 다섯 식구를 태우고 폭설  극도의 긴장감 속에 핸들을 잡았을 가장의 마음이 느껴져 안쓰러웠다. 그때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너무 배고파요!” 아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점심을 먹고 새벽 1시가 넘을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급한 대로 라면을 끓여 허기를 채우고 모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주행을 마치고 맞이한 소중한 밤이었다.



<사방이 캄캄한 가운데 앞유리로 끝도 없이 휘날리던 눈발>





이전 17화 인디언의 놀이터, 엔텔로프 캐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