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를 읽고.
우리는 꿈꾼다. 남산과 한강이 보이는 깔끔하게 정리된 내 책상이 놓인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하는 그런 ‘삶’ 말이다. 아늑한 내 집에서 아침을 시작하며 퇴근 후에는 운동을 하고 휴가 때면 내가 원하는 일정에 맞추어 여행도 떠나고 말이다. 모든 직장인들이 염원하는 워라벨을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
여기에 내가 바라던 그런 삶을 사는 듯이 보이는 한 여자가 있다. 남산타워와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빌딩에서 일 하지만 그녀는 행복하지 않다. 빗물 자국으로 더러워진 실외기를 의자 삼아 옥상에 앉아, 비싼 디저트를 먹을수록 그녀의 모습은 더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밖에서 보는 그녀는 유명 스포츠신문의 광고사업부서에서 일하는 커리어우먼 처럼 보이지만, 회사 내부에서 겪는 성희롱과 접대문화로 하루하루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힘없는 을 일 뿐이다. 회사 언니들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정말 뛰어내리고(점프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친애하는 세 언니가 두세 달 간격으로 차례차례 결혼을 해버리자, 그녀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인생도 별거 아닌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되었다.
“셋 다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결혼해버린 거야? 나 빼고 미팅이라도 나갔던 거야?”
비결은 있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왔다는 주술을 외워 천지에 오로지 한 명뿐인 운명의 상대를 소환하는 방법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요일 쌀쌀한 저녁, 회사 옥상 문을 잠그고 오컬트 행위를 하고 있자니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실패했다 생각하고 에어컨 실외기 위에 앉았다. 그리고 모든 걸 체념한 후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거기 남편이 있었다. 그것을 남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오컬트 -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적, 초자연적 현상.)
절망을 빨아들이는 ‘남편’이 있다. 그는 두 발이 둥둥 떠 있는 모습으로 인간도 외계인도 아닌, 흡사 죽은 동물과 철사, 늪에서 오래 썩은 나무로 엮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 뭐든 간에 내가 불렀으니, 성숙한 사회인이자 시민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남편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편을 위해 그녀는 처음으로 납치라는 것을 했다. 대학 동기 중 하나가 해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술을 먹여 필름이 끊긴 그녀를 업어오다시피 해서 말이다. 이후로도 많은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을, 남편에게 데려다주었다. 남편은 절망을 먹고, 먹힌 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훨씬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활기차게 다음날을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녀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진한 절망을 섭취할수록 남편은 목질화 되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장승처럼, 또 어떤 날은 발이 무거워져 땅에 닿기도 했다.
우리는 염원한다.
주술을 외워 ‘남편’을 한 번쯤은 소환하고 싶다고 말이다. 과연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것, 옷이면서 옷 아닌 것, 얼굴이면서 얼굴 아닌 것, 진저리가 쳐지는 형상을 하고 있는 ‘남편’을 감당할 수 있을까.
살면서 ‘남편’을 소환하고 싶은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있을까.
회사 회식에서 음주가무를 하며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두르는 상사와, 상사의 개인적인 심부름, 배가 만삭이 되어 볼일 보고 있는 내 위에 첫째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며 앉아 있을 때, 절망에 가까운 수치심으로 가득 차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프하지 않고 살아내고 있다.
진저리 쳐지는 생명체 없이도 살아갈 위로가 우리에게는 있다. 시나몬과 설탕을 잔뜩 뿌린 케이크와 산미 강한 아메리카노,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책에 푹 빠져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 예약하기 힘든 캠핑 사이트가 원하는 날짜에 비어 있을 때, 애정 하는 작가의 신간 문자가 올 때, 우리는 살만하다고 느낀다.
삶에서 우리가 환희하는 순간은, 찾아보면 무수히 많다. 다만 작은 행복이라 느끼고, 크나큰 절망이라고 느껴서일 뿐. 지나고 나면 추억이고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나에 가장 젊은 시절이자, 행복한 순간이다.
그래도 스스로의 삶이 절망적이라고 생각된다면 정세랑 작가의 ‘옥상에서 만나요’의 그녀의 ‘남편’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부디 정수리를 힘껏 빨리더라도 탈출구가 생기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