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반에 터덜터덜 일어나 민사소송법 기말고사를 치렀다. 코로나 방역지침 때문에 문을 열고 시험을 보느라 얼어터진 손을 호호 불어가며 답안지를 썼다. 시험을 마치고, 살짝 이른 점심을 먹고, 밀린 방 청소를 하고 집을 나섰다. 파란 하늘을 보며 문득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생각해보니, 방금 본 시험은 살면서 마지막으로 치렀을 학교 기말고사였다.
고3때, 대학교 수시 시험 보러가기 일주일 전 밤이었다. 작년처럼 또 떨어지면 안된다는 심란한 마음에, 공부가 너무 잡히지 않던 나는 10시쯤 몰래 나와서 캄캄한 교실에 살금살금 들어가 교실 컴퓨터로 스타크래프트를 켰다. 꼭 어릴때 공부하다가 딴짓할 때 엄마가 들어온다고 했던가. 켜자마자 교실을 지나가던 담임선생님께 딱 걸리고 말았다.
선생님은 잔뜩 굳은 얼굴로 당장 뒤편 교무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아 내가 시험 앞두고 무슨 짓을 한거지. 된통 혼날 각오를 한 채, 눈을 질끈 감고 들어간 교무실에는 갑자기 웬 케이크가 놓여져 있었다.
"미운 놈 떡 하나 준다고. 너 그거 다 먹고 가. 심심한데 너 마침 잘 걸렸다. 너 이제 나랑 놀아주다 가야 돼."
그날 선생님은 나를 앉혀놓고 한 시간이 넘도록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이 보기에는 많은 가능성을 가진 학생인데 내가 좋지 않은 성적때문에 너무 풀 죽어있는거 같아서 안타깝다, 시험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 적성이 맞지 않는 공부를 강요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픈 때가 많다, 블로그 글 다 읽어보고 있다, 난 블로그 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하고 싶지 않고, 블로그로 써내는 너의 생각을 대학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나눠 보면서 날개를 폈으면 좋겠는데, 대입 시험이 너에게 쉽지 않은것 같아서 야속하다 등등. 참 시험 코앞에 두고 세상 태평한, 시험과 전혀 상관 없을 쓸데없는 이야기 투성이였다. 하지만 그 쓸데없는 이야기가 1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송골송골, 영화속 한 컷 한 컷처럼 선연히 기억이 난다.
중학교때까지 성적으로 질책받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때 성적이 급전직하하자 비로소 냉혹한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알아서도 잘 하는 상급생만 끌어가려고 하고,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하급생은 끌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걸, 중학생일 땐 몰랐던 세계의 이치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른 후, 그건 선생님들의 탓이 아니라, 하급생을 끌고 가는 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어서 그렇다는 걸, 나중에 내가 선생이 되어 학생을 가르쳐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중학교 때는 성적 잘나왔다고 칭찬만 받으며 다녔으니 그 자극에 취해 살았지만, 어느새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칭찬보다는 나의 모자람을 탓하는 따가운 질책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나의 모자람을 탓하지 않고, 학교 시험과 성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준 어른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모두가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얘기하던, 대입시험의 문턱 코앞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매번 꼴도 보기 싫고 엄마 볼까 무서워 가방에 꾸겨넣던 시험 성적표를 다시 찾아내 펴서, 엉망진창인 생활기록부와 함께 클리어 화일에 소중하게 담았다. 입시 두 번에 어지간히 속이 썩었던 부모님은 갖다 버리라고 하셨지만, 나는 무슨 중2병이 걸렸는지, 나중에 성공해서 이 성적을 받고도 좌절하지 않고 성공했다고 자랑하고 다닐거라며 빡빡 우겼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던 부모님이 더 말을 않고 빙긋이 웃었다.
그렇게 시험에 진절머리를 쳐놓고는 10년이 가깝게 지나서 또 시험의 문턱 앞에 서서 성적 숫자 하나하나에 또 죽을듯 살듯 살고 있다. 하지만 그때처럼 똑같이 죽을듯 살듯 살면서도, 그 날의 가르침 덕에, 적어도 그 때보다는 성적이라는 비정한 숫자에 나의 모자람을 덜 자책하고, 그 와중에도 성적으로 평가받지 않는 나의 가능성은 무엇일지, 조금 더 멀리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마지막 문턱 하나 남았는데, 문득 대학교 문턱 앞에서서 모두가 문턱을 넘는데에만 골몰하던 때, 사실 문턱을 넘는게 전부가 아님을, 문턱 너머의 세상과 문턱 바깥 세상이 훨씬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던, 그 날 선생님의 소중한 말씀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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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끝나고 호숫가에 앉아서 한참을 생각했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보는 기분은 대체 어떨지 가늠조차 해본적이 없다. 그러나 생각보다 정말 덧없고 공허하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아마 변호사시험도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