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는데 칠흑같이 어두컴컴한 것이 새벽임이 분명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4시 50분.
불현듯 어제 금새 사람들로 가득 차
충분히 즐기지 못한 노천탕이 떠올랐다.
'설마, 이 시간에 반신욕하는 사람은 없겠지?'
5시부터 시작하는 대욕장에 가기 위해 부랴부랴 일어나
홀로 노천탕에 몸을 담그니
한적하고 고요해서 너무 좋은데
자꾸만 감기는 눈에 이게 옳은 선택인가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이놈의 본전 생각, 오늘 여행은 시작부터 비몽사몽이다.
6시 30분,
조식당이 오픈하자마자 아침을 먹으러 갔다.
조식을 먹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지 느끼는데
어느 호텔을 가건 매번 비슷한 음식만 먹지만
메뉴가 얼마나 다양한가에 따라
조식에 지불한 금액에 대한 만족도를 달리 느낀다.
먹지 않는 음식이라도 다채롭게 있으면
'음, 가격이 그 정도 할만 하구나'
생각하지만,
먹는 음식들로만 구성되어 있어도 음식이 다채롭지 않으면
'음?가격이 조금 비싼 거 아닌가'
하고 느낀다는 것인데
비싸다 느낄 땐 보상심리 때문일까
배가 부른데도 자꾸만 과식을 한다.
이놈의 본전 생각,
일찍 일어나 안그래도 비몽사몽한데
아침까지 많이 먹었으니 오늘 여행 진짜 걱정이다.
체코에 갔을 땐 유명한 시계탑이,
교토에 갔을 땐 청수사가 보수 중인 등
은근히 여행에 복이 없는 편인데
저리 예쁘다는 루리코지 5층 탑도 하필 지금 보수 중이다.
2월이면 매화가 가득 피는 곳으로도 유명하다는데
매화 한 송이 볼 수 없는 처량한 정원.
전혀 다른 의미이지만
목은 이색의 시 구절,
'반가온 매화는 어느 곳에 퓌었는고'가 생각난다.
보려고 했던 것을 하나도 볼 수 없으니
수학여행 다니듯 장소만 찍고 바로 이동.
오늘 렌트 반납일이라, 오늘 야무지게 차를 써야 한다.
일본에는 유명한 학문의 신이 3명 있는데,
그 분들을 모시는 신사를 텐만구(덴만구)라 한다.
기타노 텐만구, 다자이후 텐만구와 더불어
일본의 3대 텐만구로 불리는 호후 텐만구.
텐만구가 유명한 이유는
일본도 우리나라의 수능과 비슷한 대입 시험이 있는데
대입 시험 날 자녀의 성공을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수능 감독을 갔을 때
교문 밖에서 온종일 절하시며 기도하시는 어머님이 계셨는데
부모님의 사랑이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새삼 깨닫는다.
아내는 올해 고3 담임이 확정되어
학급 아이들의 대입 성공을 기원하며 기도를 드렸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만 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께 기도드릴 수 있다는 걸 보니
선생님들의 아이들 사랑도 결코 작지 않음을 느낀다.
곧 만날 아이들에게
영상 편지 남기라고 했다가 혼났다.
여전히 내게만은 한없이 단호한 그녀다.
히로시마 시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배고프다고 해
급히 들른 aeonmall.
다른 사람들은 여행가면
그 곳의 맛집을 찾아다닌다는데
우리도 여행 초기에는 그랬지만
SNS를 통해 알려진 맛집들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 나
굳이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그냥 다니다가 배고프면
그때 마음이 가는 곳을 들러 식사를 하는 편인데
너무 짜거나 해서 실패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이게 이 나라의 맛이구나 싶어
즐거울 때도 많다.
오늘은 마트 푸드코트라 특별할 것 없는 식사지만,
둘 모두 또 우동을 골랐다.
3일 째 점심으로 우동을 먹고 있는데
심지어 카케 우동을 각자 먹고
자루 우동을 먹고 싶어 추가 주문했다.
그 과정에서 아내가 계산하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나중에 다시 계산대로 가 상황을 설명 드릴 때
한참을 진땀 빼야 했다.
겁없이 '국제절도미수자'라고 놀리다가
또 단호한 아내를 마주해야 했다.
이제 히로시마시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네비를 찍고 한참을 눈 비비며 다시 보았다.
가리는 114km라는데 걸리는 시간이 4시간.
이렇게 오늘 일정은 강제 종료인가 보다.
히로시마시에 도착하니 진짜 오후 4시 20분.
렌트카를 반납하고
오늘의 숙소 칸데오 호텔에 도착하니 17시.
오늘 일정이 정말로 끝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