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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Feb 19. 2023

렘 콜하스의 항복: "제일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야"

02 Melun-Sénart 신도시 마스터플랜

레옹 아우콕 광장의 사례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라는 단순한 선택을 할 수 있던 것은 어찌 보면 꽤 드문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건물이나 시설이 필요해서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무언가를 그대로 간직하고 또 보존하기 위해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지어야 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이대로도 좋은 것을 간직하고 더 잘 사용하기 위해서 보존 계획이나, 도시 재생 계획, 커뮤니티 계획같은 것들이 종종 필요하다. 하지만 아름답고 근사한 것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마음먹고 계획한 대로 우리 곁에 호락호락 남아주지 않는다. 또 계획이란 얼마나 잘 틀어지는지. 하루의 작은 계획도 바뀌기 일쑤인데, 건물이나 마을, 도시 전체를 위한 오랜 시간의 계획쯤이야.


라카통바살의 광장 설계로부터 10년 전, 1987년에 파리 근교의 신도시를 계획하는 공모전에 참가하는 렘 콜하스의 마음도 아마 이러한 이유로 복잡했을 것이다. 믈렁 Melun 과 세나르 Senart라는 파리 남쪽에 위치한 지역의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이를 그대로 둔다면 아마 마구잡이로 개발되어 금세 특성 없는 그렇고 그런 근교가 되어버릴 터였다. 그러니 신도시를 짓기 위한 마스터 플랜의 목표는 동네가 무분별하게 도시화하며 성장하는 것을 막고 필요한 기반 시설과 고유한 정체성을 갖춘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 평화로운 농촌 마을과 아름다운 숲을 마주한 렘 콜하스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이유야 어쨌든 어떤 식의 개발도 이곳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해칠 터였다. 후에 이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위해 쓴 <항복> Surrender라는 글은 푸르른 대지를 담은 항공사진과 함께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곳에 도시를 상상해야 한다는 것은 모욕적일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It was heartbreaking, if not obscene ... to have to imagine here, a city."


S,M,L,XL (1995)에 실린 Surrender.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점에서 다가오는 세기말을 앞두고 우리 시대 가장 잘 알려진 건축가 렘 콜하스는 건축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져만 가는 현대 도시는 이미 완전히 통제를 벗어난 듯 했고 건축과 도시를 계획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순진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에게 건축가란 이미 실패한 직업이었다. '지어진 것' (the built), 즉 도시와 건축은 정치나 경제 상황, 인구의 증가, 이런저런 집단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예측할 수 없는 말썽거리였고, 이는 믈렁-세나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어떻게 지을지 아무리 계획한다 해도, 마구잡이로 지어지는 건물과 자라나는 도시를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실패할 계획을 세우며 이런 혼란과 불확실성에 무의미하게 저항하기보단 그냥 차라리 확실하게 '항복'하는게 낫지 않을까?


이런 항복은 왠지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의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제일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야. 인생은 계획대로 안되거든. 계획은 세워봤자 틀어지기만 해. 계획이 없으면 틀어질 일도 없고. 무슨 일이 닥쳐도 아무렇지 않지." 하지만 렘 콜하스의 항복은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의 초점을 옮기는, 말하자면 전략적인 항복이었다. 렘콜하스가 보기에 어떤 공간이 삼차원적으로 어떻게 채워지고 지어질지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에 비하면, 어떤 공간이 그냥 비어있도록 지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보였다. 그렇다면 어차피 실패할 '어디에 무엇을 지을까'를 계획하지 말고 차라리 '어디에 짓지 않을까'를 계획하면 어떨까? 그리고 나서 이렇게 '짓지 않기로 정한 공간'이 확실히 비어 있을 수 있도록 개발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면 도시가 마구잡이로 지어져도 도시의 기능이나 경관을 어느 정도는 보증할 수 있지 않을까? 비워져 있는 공간은 건축으로 채워진 공간이 절대로 성취하지 못할 확실성, 일관성, 유연함과 자연스러움을 도시에 줄 터였다. 또한 이런 빈 공간은 계획하거나 예상하지 못하는 다양한 용도나 필요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렘 콜하스는 건축에 반대되는 '빈 공간' 보이드라는 주제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85년에 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상상하기" Imagining Nothingness 라는 제목의 글은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무엇이나 가능하다.
건축이 있는 곳에는 (그 외에)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다."
“Where there is nothing, everything is possible.
Where there is architecture, nothing (else) is possible.”



믈렁-세나르 계획은 이렇게 항복함으로 건축가가 무엇을 어떻게 지을지 계획하는 역할이라는 것을 포기하고, '짓지 않는 것' 그리고 '비워두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하는 데서 시작한다. 어느 도시에나 보이드는 생기기 마련이지만, 믈렁 세나르 계획에서는 이런 빈 공간 - 보이드가 단지 건물이 지어지고 남은 부분이 아닌 도시의 핵심적인 공간으로 가장 먼저 계획된다. 렘 콜하스는 그 동네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개발 가능성에 따라 세심하게 보이드가 되어야 할 지역을 정했는데, 이런 보이드에는 인근의 숲을 보호하고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곳, 교통 완충 지대, 도시의 중심축이 될 공원, 앞으로 캠퍼스가 들어설 공간 등을 포함하였다. 그리고 이 보이드를 제외하고 섬처럼 남은 나머지 부분은 도저히 컨트롤할 수 없는 도시의 변화와 확대에 '항복'하는 것이 도시계획의 골자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이 건축의 '섬'들은 일관적 큰 그림 없이 개별적으로 또 무작위적으로 개발되겠지만 도시를 관통하는 보이드는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고 매력을 더하는 도시의 중심축이 될 터였다.


Melun-Senart 도시 계획. 일반적인 다이어그램과 달리 검은색이 비워질 부분이다. (출처: https://www.oma.com/)


프랑크 푸르트 건축 박물관에 전시 되었던 믈렁-세나르 도시 계획 모델.



대담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콜하스는 아쉽게도  공모전에서 2등에 머무른다. 짓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을 계획한다는 명제가 가진 모호함이나, 보이드 영역의 실제 위치가 맞지 않는다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  그는 송도 신도시 계획 공모전에 당선되며 비슷한 전략을 시험해  기회를 . 믈렁-세나르와 마찬가지로 송도의 도시 개발은 수많은 변수가 놓인 지뢰밭 같은 곳이었다. 그가 예측  대로, 송도의 도시 계획은 경제 위기와 개발사, 당국, 기타 기업  시민들의 각기 다른 관심사로 인해 부침을 겪으며 끝도 없이 수정되었고, 이제는 건축가 본인도 내세우지 않는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계획했었던 완공 시점이 20년이 넘은 지금도 도시는 여전히 미완성이며 완공  날은 아직도 까마득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송도를 보면, 센트럴 파크를 비롯해  콜하스가 계획했던 보이드 공간이 여전히 건재하고, 그가 그렸던 마스터 플랜의  틀이 남아있음을   있다. 그의 전략은 어느 정도 통했던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있을 것이다.






Böck, I., 2015. Six Canonical Projects by Rem Koolhaas.

Hall, P., 2014. Cities of tomorrow: an intellectual history of urban planning and design since 1880. Fourth edition. Hoboken, NJ: Wiley-Blackwell.

Koolhaas, R., 1995a. Imagining Nothingness. In: R. Koolhaas and B. Mau, eds. S,M,L,XL. 198–203.

Koolhaas, R., 1995b. Surrender. In: R. Koolhaas and B. Mau, eds. S,M,L,XL. New York: The Monacelli Press, 972–989.

Koolhaas, R., 1995c. What Ever Happened to Urbanism? In: K. Rem and B. Mau, eds. S,M,L,XL. 958–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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