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를 떠올리
도시에서 비둘기는 매우 흔하다.
그래서 신기하거나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개인적으로)
비둘기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흔하고 특별히 위협적이지 않다.
그래서 떼로 모여 있거나 혼자 있거나 간에 사람을 잘 피하지 않는다.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비둘기 한 마리가 근처를 왔다 갔다 한다.
과자 부스러기라도 원하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특별히 내게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빨간 발을 따박따박 땅에다 디디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비둘기가 움직이는 걸 보면 머리가 추진체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머리가 먼저 방향을 정해서 앞뒤로 왔다 갔다 움직이면 그다음에 발이 그쪽으로 간다.
다른 새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비둘기처럼 사람 가까이에서 도망도 안 가고 오래 걸어 다니는 새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이 동작을 할 때도 분명 뇌의 작동이 있지만 머리를 움직이지는 않는데,
비둘기는 뇌를 쓸 때 겉으로 드러나는 건가, 아니면 직립이 아닌 몸 구조 때문에 균형을 잡기 위함인가 모르겠다. *
참! 비둘기의 뇌 크기는 사람 집게손가락 손톱 정도라고 한다.
뇌는 작아도 어린이들이 단어를 배우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물을 인지하고 학습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미국 아이오와대 연구진>
그러니 우리가'새대가리'라고 하면서 새들의 지능을 가소롭게 생각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내가 본 비둘기의 깃털 색은 회색 바탕인데 꼬리 쪽으로 가면 검은색이다.
머리와 가슴까지는 감색에 가깝고 광택이 있다.
내가 자꾸 쳐다보는 걸 아는지 돌아서 꼬리를 보이며 멀어지려 한다.
약간의 인내심을 갖고 비둘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으니
다시 몸을 돌려 걷는 비둘기 옆모습에서 눈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비둘기 눈을 찍으려고 하는 이유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라는 책 때문이다.
그 소설에는 비둘기에 대한 묘사가 아주 세세하다.
비록 비호감으로 공포스럽게 표현하긴 했지만,
특히 비둘기 눈에 대한 묘사는 언뜻 생각하기에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 눈, 작고 둥그스름한 원반형에다
가운데가 까만 갈색인 그것은 보기에 너무나도 끔찍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머리털에 꿰매어 놓은
단추처럼 보였고 속눈썹도 없는 듯 광채도 없이,
그냥 무턱대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끔찍스럽게 무표정한
시선을 밖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중략)
외부의 빛을 몽땅 빨아들이기만 할 뿐
자기 자신은 빛을 전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생명이 없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어떤 광채나 희미한 빛조차도 그 눈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살아있는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할 눈이었다.
바로 그 눈이 조나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중에서
소설 주인공 조나단은 자신의 집 앞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공포를 느끼고 급기야 집을 나가기까지 한다.
겨우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사람의 일상이 엉망이 되다니,
편집증 같고, 우스운 일이다 싶지만
사소한 일로 자신을 괴롭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완전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게다가 소통이 전혀 될것 같지 않은 대상을 눈앞에 직시하는 괴로움도
알만한 사람은 안다.
조나단은 그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고 했는데,
나는 도저히 비둘기랑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의식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둘기가 자꾸 피했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작가의 표현처럼
비둘기눈이
갈색의 까만 눈동자를 하고 있는데 표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저히 소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먹먹하고, 막막한 느낌이겠지.
흰바탕에 까만 눈동자를 본 비둘기는 또 어땠을까.
비둘기는 그동안 사람을 볼만큼 봤고 이미 상황판단을
끝냈는지 모른다.
'도저히 소통할 수 없는 눈이다. 딴 데로 가자.'
비둘기는 점점 꼬리를 보이며 멀어져 갔다.
*비둘기는 안구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눈 대신 머리를 움직이는 거라고 한다. (이은희 과학작가 칼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