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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즌정 Dec 29. 2022

당신은 내 어머니의 모습을 한 천사였어요.

신께서 당신을 거둬들일 때, '잘 왔다'라고 말씀하셨겠죠.

 사실 나는 독한 년이라고 욕을 먹어야 마땅하다. 스물여덟이 겨우 지난 겨울, 어머니를 보내면서도 나는 장례식장에서 손님을 맞이하느라 웃기만 할 뿐, 그 흔한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으니.

 딸이 귀한 집안에 막내로 태어나 여기저기서 복에 겨운 관심을 받았어도, 내게 늘 유일하게 단호했던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고 또 어머니의 사랑을 나는 가장 그렇게도 원했으면서도,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나는 남 앞에선 결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눈물을 흘린다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넘어져서 울고 징징대거나 할 때에,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남들이 나를 무시하고 해할 거라고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언제나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고백하자면 나는 사회 친구가 거의 없다. 아니, 20대 때 학업과 함께 쉰 적 없이 일만 했는데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인간관계는 다 죽어있었다. 그땐, 내가 죽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나의 생존' 외에는 여유가 없었다.


 '자유로운 영혼'이신 아버지 덕분에 거의 홀로 생계를 책임지시던 어머니께서는 내가 열다섯 되던 해에 원인 모를, 불치의 퇴행성 질환 진단을 받게 되시면서부터 우리 집 형편은 점점 어려워졌고, 어릴 때부터 조금씩, 내 앞으로 모아둔 적금을 깨어가면서 합격한 대학의 학업을 어떻게든 마치기 위해,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그와 별도로 드는 생활비와 용돈과, 집안 식구들의 벌이가 아예 없었을 때 내야 했던 어머니의 병원비 등으로 인해 오전에 졸면서 꾸역 듣는 대학 수업보다도, 나의 입학증서를 팔아가며 오후부터 밤까지 하는 학원과 과외 일에 시달리면서 그 외적인 인간관계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어머니의 병이 점점 심해지면서는 일을 하고 돌아오면 집에서 어머니의 식사, 거동까지도, 나중에는 배변과 기저귀를 가는 것까지 옆에서 붙어 다니며 돌봐야 했었고, 교대로 어머니의 간병을 하며 지친 철없는 아버지의 짜증과 술주정이 나를 더욱 날 서게 만들었고, 난 보이지 않는 나의 미래와 불안 속에서 울다가, 떼쓰다가, 지치다가.


 그런 마음으로 삶을 끝내고 싶다가도 언제일지 모를 어머니의 마지막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내겐 자살마저도 사치라 생각했던 때를 지났다. 그때의 기억들은 사실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에 대한 몸부림에 가까웠으니.


 그럼에도 혼자인 게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는(물론 그 친구들도 여전히 나의 이랬던 사정을 정확히는 모른다.) 정기적으로 연락이 닿아서 겨우겨우 맞춰 놀기도 했다, 물론 그마저도 버거웠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 그때도, 그냥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나의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를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오래된 친구들에게도 선뜻 다 열지 못한 마음을, 하물며 어떻게 신선한 인간관계에 신선한 표정과 말투로 다가갈 수 있었을까. 변명을 하자면, 그때의 난 너무도 망가져 있었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나의 온전함에 대해 의심을 하곤 한다.)


 그래서 이십 대의 마지막 자락에 맞이한 어머니의 장례식 때 나를 찾아와 울어주었던 오랜 친구들 외에는 새롭게 관계를 맺고 시작하느라 힘에 부쳤다. (슬프지만 여전히 30대에 맺을 수 있는 관계의 텐션감과 거리감, 속도감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노력은 하고 있다.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깊게 가까워지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게만 가혹해 보였던 20대를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견뎌냈다. 그땐 내가 견뎌낸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과제였으니.


 하지만 내 삶을 지키려던 욕심이 너무 과했던 탓이었나, 어머니를 그렇게 추운 겨울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울며 소리치며, 나의 삶을 찾고 싶다고 떼쓰던 때에, 어머니는 어느새 급격히 쇠약해져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병원비와 내 생활비 등을 벌기 위해서 그렇게 어머니께서 사경을 헤맬 때도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밝은 척 웃어대었는데, 막상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신앙이 없던 나는 나름대로 기도도 했다. 원래도 어머니의 간병으로 포기했던 내 인생을 어머니를 위해, 아무런 욕심 없이 온전히 다 내려놓을 테니, 제발 어머니를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이제 어머니를 내게서 데려간다면 이 세상에서 나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줄 사람이 없을 걸 알았고, 제발 그 유일한 존재를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나는 일이 끝나고는 매일 밤 친구가 데려다줬던 성당 앞 성모상에서 늘 기도를 했다. 하지만 그게 내 욕심인 걸 나도 알고는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어머니가 떠나시기 전부터 의사는 내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했었기 때문에.

 하지만 단단한 적 없던 내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고장이 나 있어서, 이미 한 달 전부터 급격히 쇠약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울기만 할 뿐이었고 그런 내 망가진 모습에 의사도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는지, 내내 울기만 하던 내 앞에서 자꾸만 내 어머니의 마지막을 설명하다가 지친 듯, 날 남겨두고 먼저 진료실을 나서기 일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되었다. 너무도 젊은 나이였는데. 엄마는, 우리 엄마는 좀 더, 오래 살면서 더 많은 대접을 받았어야 했는데. 평생 우리 가정을 책임지시느라 벌던 돈을 내가 이제 벌테니. 그럼 난 맛집도 데려갔을 테고, 카페도 데려갔을 테고, 영화도 보여줬을 테고, 여행도 데려가줬을 테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옷들도 내가 입혀줬을 텐데. 내가 다 해줬을 텐데.


 그렇게 강인하고 꿋꿋하게 버텨오시던 우리 엄마가, 마지막 순간까지 열에 들뜬 모습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간신히 숨을 쉴 때에 나는 그게 내 이기적인 바람이었단 걸 뼈저리게 알았다.

 여태껏 이렇게 버티신 것도 날 위해서였을까. 그렇게 뼈밖에 없는 마른 몸으로 힘겹게 허공을 응시하던 어머니를 깨닫던 순간, 제발 조금만 더 살아있어 달란 것도 내 욕심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내가 아닌,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했다.


 어머니를 슬프게 했던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다 지우고, 고통 없는 곳에서 지내시라고. 내가 어머니를 기억할 테니, 제발 이 세상의 슬픈 기억들은 모두 내려놓고 가시라고. 그리고 그렇게 세상 나 잘난 체했던 대로, 누구보다 내가 잘난 삶을 살 테니 걱정 마시라고.


 그렇게 초라한 내 모습을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고, 나는 슬펐지만 또 기뻤다. 세상에 태어나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처음으로 생겼던 것이라 웬만한 것은 모든 게 재미있었고 즐거웠다. 웬만한 것에는 화도 나지 않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래야 했다. 세상에서 나 말고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던, 그리고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줬던 어머니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삶이었으니.

 매 하루를,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살려고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 처음 태어난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고, 온몸으로 느끼고 겪고 있으니.

 모든 일이 끝나고 돌아온 날 밤, 옆에 가만히 누워 내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하면, 가벼운 웃음으로 즐거워하셨으니. 나는 내 이야기를 채우기 위해 늘 분주히 살고 있다. 내가 다음에 엄마를 만났을 때에 이렇게 또 누워, 이랬던 또 저랬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사실 여전히 어머니가 곁에 없다는 실감을 잘하지는 않는다. 그저, 서로 닿을 수 없는 먼 세계에서, 어딘가에서 내가 모르는 모습으로 살고 있단 상상으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한다. 그러면 하루를 또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된다.   


 그리고 이젠 나이가 꽤 지난 터라서, 이런 이야기들을 꽤 자연스럽게 생판 남에게도 술술 털어놓을 수도 있게 되었고, 그냥 나도 또한 보편적인 중에 특별한 사연을 가진 어느 한 사람이 된다.


 그때의 난, 나만의 아픔에 갇혀 내가 가장 힘든 줄로만 알았는데 살다 보니 각자의 특별한 아픔이 어느 하나씩 다 있었다는 거. 그리고 그렇게 나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고 있었더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원래, 아파 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안다고 했으니.


 그래서 이제 나는 어머니의 존재가 내게 '있어줬다.'라는 것만도 너무 감사하다. 세상에 그런 존재 자체를 못 겪어본 사람도 훨씬 많을 텐데.


 지금보다 어릴 때엔, 혼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왜 나를 사랑했다면서 나를 떠나갔어?'라고 슬퍼했지만, 지금은 내 기억 속에서 언제나 희망을 주는 존재이고, 내가 똑바른 삶을 살아갈 이유이기도 하면서, 내게 다른 신앙이 없어도 바른 삶의 도 지켜야 할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

 그래도 내게 누군가,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 자신보다도 사랑해줬던 존재가 있었구나, 하고. 그것만으로도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그걸 알게 해 주신 것만도, 내가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어머니가 날 사랑해 주신 것처럼 나도, 누군갈 사랑할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위해 뭘 해주고 싶었구나, 그래서 또 슬펐구나 하고 깨닫게 해주신 것만도 내겐 커다란 의미였다는 거.


 그래서 남들의 아픔도 더 헤아릴 수가 있고, 삶의 깊이에 대해서도 항상 생각할 수 있다는 거. 지금 겪고 살고 있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도.


 그렇게 오늘도 나는 내 이야기를 채우고 있어요.

다시 만나는 때에는 곁에 누워 나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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