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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즌정 Nov 20. 2022

사랑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닌 나 자신의 붕괴이다

<헤어질 결심>,  2022


사랑에 빠지기까지

 영화는 두 남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런데 그 시작의 단계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둘에게는 각자 이미 배우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사랑이 '결실'이 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가 필요했다.


 바로 '헤어지는 것.'

기존의 관계와 헤어지는 것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 잡고 헤어질 결심을 한다는 것은

기존 인연과의 것인지, 아니면 뒤늦게 찾아 들어온 설렘에 대한 헤어짐인지 알 길이 없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표현하는 것을 꺼린다. 안개 같은 모호함이야말로, 앞으로의 관계와 이야기의 전개와 방향성을 추리하게 되는 스릴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이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지 않은가

 범죄 용의자와 형사로 만난 남녀 주인공의 설정은 자칫, 진부하고 고루한 예전의 흔한 이야기들 중 하나가 될까 봐 다소 우려되는 부분이었다.


금단의 사랑은 꽤 흔한 주제다.

거기다 불륜까지 더해진 설정이기에 어떻게 저급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감독이 참 대단한 게, 그 낡은 필터 입힌 흐릿한 색감만으로도 이 이야기는 흔한 싸구려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줬다.


이야기의 소재도 그렇지만, 소품이 주는 디테일과 장면의 색감, 직접적으로 심리를 말하지 않고 묘사하는 느낌이 어쩐지 '화양연화' 영화를 닮아 있었다.


 오히려 위 제목과 같은 대사로 인해 주인공 캐릭터의 설정이야말로,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는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주는 당위성을 부여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에서 해준은 유능한 경찰이고 어린 나이에 진급도 빨랐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다뤄왔던 형사는 열혈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그의 차분함이 어딘가 낯선감이 있기는 했어도 박해일이란 배우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지나치게 정제된 말투와 행동, 그리고 주말부부이지만 결혼생활에 충실한 모습은 그가 평판에 대해 집착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그 모습 자체가 그가 살아온 배경, 추구하는 삶의 목표 등을 보여주는 듯했다.


특히 해준이 인공눈물을 넣는 그 눈과, 사건 피해자의 눈이 오버랩되며 전환되었을 땐 시체의 눈에서 바로 장면 전환이 되어 해준의 눈으로 옮겨가면서, 본인의 눈에 생명력을 억지로라도 부여하는 모습에, 인공적으로 눈물을 넣어야 할 만큼 해준이 그만큼 감정에 메마른 사람인가 싶은 생각을 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부인도 '이과적'이라는 표현을 하며 스스로를 소개했으며, 원전의 '안전'을 담당하는 일을 함으로써, 해준의 모습과 해준이 택해온 삶, 결혼 등 그의 선택은 늘 안전, 그리고 이성적임을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와 대비되는 서래는 외모는 예쁘지만, 중국 출신의 여자로서 신비로운 태도로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몸에 상처가 나 있고, 요양보호사 일을 하면서 한국인으로서 소속되고자 애를 쓰는 모습을 보인다.


두 번째로 해준과 이포에서 조우했을 때 그녀는


나 같은 사람이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

고 말한다.


그런 그녀가 유능한 형사를 동등한 사회적 위치에서 그녀가 자연스럽게 만나기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어쩌면 가장 확실하게, 쉽고 빠르게 형사를 만나는 방법은 그녀 말대로 용의자가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해준은 극 중에서 서래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긴장을 하지 않을 때에도 자세가 꼿꼿해서'라고 언급한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1) '긴장을 하지 않을 때=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에도 늘 한결같이 자신을 굽히지 않는다.

      즉, 평판과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는 해준 자신과는 다르다.

 2) 긴장을 하지 않을 때란 어쩌면 서래에게 없어서 늘 자세가 꼿꼿할 수 있다,

     그녀에게는 한국에서의 삶 자체가 (윤리적인 문제를 차치하고서) 치열한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서로에겐 자신과 다른 극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첫 사건으로 해준이 서래를 마주했을 때에는, 그녀가 진술하는 내용과 눈앞에 보이는 증거들을 있는 그대로 믿으려 한다.


유능한 경찰의 판단이라고 보기에는 서래에게 설렘, 관심을 갖고 그녀를 관찰하는 장면을 통해  해준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에 휩쓸린다는 상태를 꽤나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불륜이라고 콕 집어 인정할 만한 특별한 애정행각을 보이는 장면도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해준의 지나친 잠복이 들켰을 때에

둘이 조사실에서 먹던 차가운 초밥 도시락의 식사가 어느새 해준의 '따뜻한 요리'로 변해갔을 때 관객들은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했을 것이다.


 그럼에 따라, 그녀의 결백을 믿으면서 애정은 더욱 깊어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반론하는 수완(고경표 분)이 해준이 사건을 수사하는 기준과 판단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면서, 해준의 의도가 순수한 이성으로서만 작용한 것이 아님을 더욱 강화시켜준다.


수완의 의문은 곧 관객들의 의문이기도 했다.


과연, 서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해준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서래에 대한 관심도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해준은 이 때도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해준에게 헤어질 결심이란, 어쩌면 서래를 향해 먹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해준이 증거가 될 휴대폰을 바다에 빠뜨리라고 하고 떠나자,

서래는 그의 마지막 말까지 녹음한 파일을 지닌 채 시간이 흐른다.


자신의 부인을 따라 조용한 이포에서 살게 된 해준,

그리고 마치 그를 따라온 듯한 서래는 또 다른 남편과 함께였다.

하지만 그 남편의 신분 역시 위태로웠다.

투자 사기로 졸부가 된, 맞춤법을 중국인 출신 아내보다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껄렁한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은 그녀가 또 이런 선택을 의도적으로,

그러니까 죽이기 위해서나, 또는 본인의 생존을 위해 그런 남자들을 택한다고 할 수도 있었을 거 같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생각해보면 서래만큼은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이 언급했다.


그리고 말로만 사랑한다는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도중에 홍산오(박정민 분)의 사건에서 그 살인의 동기가 '사랑'이었음을 바로 알아차린다.


사랑이 아니라면 그저, 그녀는 스스로의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남자 중 어쩌면 가장 괜찮았을 선택을 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홍산오는 '여자들은 쓰레기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식으로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극 중에서 말을 하는데, 그 말처럼 서래 또한 그런 류의 남자들과만 결혼을 했다.


사랑을 위해서? 아니면 돈을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분명한 건 해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하진 않았어도,

진짜 그녀가 원하던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줬던 해준만큼은 잊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2차 사건에 대해서 일정 부분 책임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해준의 안전, '붕괴 이전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녀가 후반부에서만큼은 해준을 정말 사랑했다고 믿는다.



특히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말은1차 사건에서는 서래가 해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지라도, 해준이 서래에게 심경을 토로하며 떠날 때만큼은 이미 서래의 마음이 해준에게로 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해준은 '자신은 사랑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는 객관적인 사실로 감정을 부정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정말 한 적이 없는 것은 사실이 맞았다.

이때 어쩌면 서래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당했고, 해준에게는 부인과 헤어질 결심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부정한 그 감정의 행방은, 사랑이란 말로 녹음되지 않았기에 기록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증거가 되기를 서래 본인이 택한다.

본인이 해준에게 영원한 미결로 남겠다 한 것이다.


해준에게는 미결 사건을 벽에 붙여놓고 늘 보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미결로서 기억되고 싶다는 그녀의 희망이 아니었을지.



정말 사랑이었을까

 이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정의 내리는 것을 피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느꼈던 감정도, 색깔이 뒤바뀌는 서래의 원피스도, 이포의 안개도, 사건의 경과에 대해서조차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품게 한다.


부산에서 1차 사건으로 서래가 조사받을 때는 해준이 서래에게 갖는 관심이 부각되어, 그 이성을 환기시키는 용도로 수완이 투입되어 끊임없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의심을 한다.


해준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되자,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서래의 거짓말로 인해 자신이 붕괴되어버렸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해준은 그녀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


이때 서래는 아무런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내를 따라 이포에서 조용히 살게 된 해준은 안전한 삶을 위한 노력을 했다.


서래도 또한 이포에  '헤어질 결심'을 위해 왔다고 말한다.

여기서 서래에게 헤어질 대상이 의미하는 바도 특정할 수 없다.

기존의 남편과 헤어지려고 했다가, 그러나 해준을 다시 보고 마음을 바꿨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한 해준과의 관계를, 또는 그녀가 살아온 인생 등...
 

2차 사건을 통해 만났을 때에는, 비슷하게 반복된 사건으로 인해 해준은 처음부터 서래를 의심한다.

이 때는 연수(김신영 분)가 반대로 서래가 결백하지 않냐며 해준이 내리는 이성적인 판단에 대해 감정에 호소하는 질문을 던진다.


해준은 뒤늦게서야 서래의 진짜 의도를 파악한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진짜 서래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정작 헤어질 결심을 하고 돌아서는 아내를 잡지도 못한다.

그가 바다를 좋아하기에는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불쌍한 여자 vs 독한 것

서래의 성격의 본질에 대해 두 가지 평이 나온다.

힘들게 타국으로부터 왔지만 남편을 불의의 사고로 두 번씩이나 잃은 불쌍한 여자,

서래는 스스로를 그렇게 평했다.


하지만 그녀가 첫 번째 남편에게 들었던 평가는 '독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정말로 하란다고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또 상대에게 잊히지 않겠다고 자신이 스스로 바다 깊이 빠져버린다는 과격한 발상에 '독하다'라고 봤을 수도 있다.

실제로 서래는 그 두 모습 그대로, 서래의 원피스 색깔처럼.

때로는 불쌍해 보였으며, 때로는 독해보이기도 했다.


그런 불쌍하면서도 독한 결말부는 영화적 장치로서는 매우 여운이 남았다.

'러브 미 이프 유 데어'라는 영화 작품에서는 남녀 둘이 키스하며 쏟아지는 액체상태의 콘크리트를 맞는 것이 결말이었는데, 나는 그 결말부가 솔직히 너무 파격적이라서 좀 '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반면, (문화적 차이일까)


서래가 보여준 인물상이라면 어쩐지 가능할 법도 같았던 결말이었고, 서정성을 위한 과격함이 퍽이나 마음에 들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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