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토치를 사야해 말아야 해?
바나나는 있는데 토치가 없을 때.
나는 스물다섯에 결혼했다.
왜 그렇게 일찍 했느냐고 묻지 마라.
인생이 그런 거다.
예측할 수 없고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거.
어쨌든 며칠 뒤가 결혼 16주년이고 우린 미리 축하런치를 함께 했다.
검색해서 찾아간 cozy라는 음식점은 남자 사장님 혼자 1인 4역을 하는 곳이었다.
주문, 요리, 서빙, 설거지까지.
싱싱한 로메인에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을 듬뿍 올린
푸짐한 시저 샐러드에 영국 맥주 ‘세러데이’의 조합으로 시작이 만족스러웠다.
관자 구이는 누가 봐도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에
저절로 손이 갈만한 멋진 플레이팅이 돋보였다.
맛은 비주얼만큼은 아니지만 쫄깃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훌륭했다.
대망의 스테이크도 좋았고,
격자무늬의 구운 새송이버섯은 고기만큼 맛있었다.
아스파라거스인 줄 깜빡 속았던 꽈리고추 구이는 의외였지만
느끼할 수 있는 스테이크와 궁합이 좋았다.
맵찔이인 나는 한 입 먹고
혀를 뱅뱅 돌리며 물을 찾았지만 말이다.
기분좋게 식사를 마무리할 때쯤
사장님께서 디저트로 표면이 빛나는 길쭉한 바나나 반쪽을 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박나래 덕분에 붐이 일었던 ‘바나나 브륄레’였다.
바나나를 길게 반으로 자르고
설탕을 뿌린 뒤 토치로 살짝 구워 만든 것이다.
신랑은 토치로 구운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오븐에 하면 될거라고 우겼다.
아이들 간식 메뉴 고민으로 골치가 아픈 나에게 반가운 디저트였다.
‘좋아, 이거 뭐 대단히 쉽겠는데!’
집에 오는 길에 바나나를 샀다.
마침 한 뭉치에 2900원으로 세일중이었다.
운명이다. 내가 바나나 브륄레를 만들 운명!
다음 날, 표면을 카라멜라이징한 방법을 알아보려고
초록창에게 도움을 청했다.
재료: 바나나, 설탕
준비물: 토치
토치, 신랑 말이 맞았다. 대체로 내 말이 맞는데 이상하다.
그냥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에 해볼까? 일단 포기해야 하나?
그러다 생각은 다소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점화기.
센 불로 하면 비슷하게 될 것 같았다.
실패할 수 있으니 조금만 잘라 설탕을 솔솔 뿌리고
점화기 화력을 가장 세게 해서 바나나에 불을 질렀다.
설탕이 녹는다.
뭔가 될 것 같은데 그냥 녹기만 하고 표면이 사탕처럼 굳어지지 않았다.
바나나는 있지만 토치가 없을 때, 토치 대신 점화기로 구운 바나나는
그냥 녹은 설탕이 얹어진 바나나가 됐다.
마치 글쓰기의 재료는 잔뜩 있지만,
어설픈 기술로 끄적여 어딘가 엉성한 내 글 같아 서글퍼졌다.
그래도 바나나 브륄레에서도 생각이 글쓰기로 귀결되는 걸 보면
요즘 나는 글쓰기에 퍽 진심인 거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으니
내 글도 통하는 날이 오겠지.
그래서 토치를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