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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Jul 18. 2023

아이의 떼쓰기: 행복하고야 말겠다는 선언

아이가 부러울 때가 있다. 그리고 가엾을 때도 있다. 아이의 어리석음에 실소할 때도 있고 아이의 지혜로움에 감탄할 때도 있다. 아이의 모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 현관문 밖에서 "엄마!"를 외친다. 문이 열리고, 급하게 신발을 벗어던지고, 가방을 내동댕이 친다. 가볍게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지며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향한다.


'손을 씻어라', '가방을 먼저 정리해라', '알림장 꺼내야지'라고 컴퓨터와의 만남을 지연시키는 나의 말에 순순히 응할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격렬하게 '지연 불가'를 외칠 때도 있다.


"내가 오늘 학교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오늘 수학도 했다. 학교에서 5교시까지 했다고!"


아이는 자신의 행복을 지연시키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 행복을 받아 마땅한 오늘 하루의 견딤에 대해 말한다.


견딤을 증명이라고 하듯 가방의 지퍼는 다 열려있고 미처 꽉 닫지 않은 물통에서 물이 줄줄 흐를  때도 있다. 가방 지퍼를 닫을 새도 없이 그렇게 교실을 벗어나 집으로, 게임으로 돌아오고 싶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 걱정이 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게임이 뭐라고, 저렇게 좋을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가치 있어 보이지 않는 행복일 수 있다. 게임 말고 좀 더 건강한 행복을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감미료가 잔뜩 들어간 과일향 음료가 아니라 생과일주스를 갈아주고 싶은 마음처럼 뭔가 진짜 즐거움을!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오늘의 행복은, 현재의 행복은 게임이라고 말한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그 행복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떼쓰고 머리를 굴리며 협상하고 쟁취한다.


오늘은 갑자기 그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럴싸한 행복이 아니어도 자신에게 중요한 행복이라면 떼쓰고 억지 부리고 다른 사람의 이맛살에 주름이 생기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그 태도가 조금 대단하다.


생각해 보면 아이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은 자주 바뀌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언제나 그것들에 몰입했었다. 세상이 온통 그 대상으로 가득 찬 것처럼 아이의 눈과 귀와 입은 그 대상만 보고, 듣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하찮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핑크퐁, 뽀로로, 헬로카봇, 또봇, 드라이브 헤드, 엔진봇, 토미카, 프라레일, 베이블레이드, 신비아파트, 곤충, 열대어, 식물 키우기, 곤충 표본... 그리고 지금은 마인크래프트이다.


아이는 정말 남에게 보여주기 그럴싸한 취향이나 기쁨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에 몰두했다. 물론 그 몰두를 위해서 나의 지갑은 계속 열려야 했다.


아이는 그런 행복을 위해 부모에게 떼를 써야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아이가 아니라 '자아'에게 떼를 써야 하는 것 같다.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성장'과 '발전'으로 나아가게 하는 멋진 취향이 무엇인지 아는 나의 '자아'에게 떼를 써야 인공 감미료로 잔뜩 범벅이 된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떼쓰기를 매번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아이'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나에게 떼를 써본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분명 피곤할 것이 뻔하지만,

웹툰 정주행하면 안 돼?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라면에 스프를 솔솔 뿌려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헤드폰 끼고 드러누워 유튜브 보면 안 돼?


 2023년 7월 16일 저녁 7시.

"엄마 여긴 왜 항상 빨간불이야?"

매번 빨간불에 멈추게 되는 교차로 신호등 뒤로 무지개가 떴다.


하늘에 무지개가 걸릴 때처럼 가끔은,


솜사탕 같은 설탕과 색소가 범벅되어 분명 몸에 나쁠 것은 알지만 눈과 입이 즐거운 것이 분명한 그런 행복을 떼쓰듯이 받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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