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재직하는 동안 회사의 옥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담배라도 태웠다면 입사하자마자 옥상을 비롯해 건물 구석구석 많이 탐방했을 테지만, 나는 흡연자도 아니라서 굳이 높은 옥상까지 오를 만한 별다른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널찍한 옥상은 사람도 하나 없이 조용했고, 내 예상과는 달리 담배 냄새도 안 나고 꽤 쾌적했다. 더 가까워진 한낮의 해에 피부가 따갑긴 했지만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것이 눈물을 말리기 딱 좋았다. 서른이 되던 해, 처음으로 회사에서 울기 위해 옥상에 올랐다. 나이에 비해 가진 경력들이 별것도 아니지 않냐며 소위 말하는 '물경력'을 들이밀며 나를 비난하던 상사의 모진 말은, 맘껏 눈물을 쏟기 좋은 명분이 됐다. 내내 속을 짓누르던 답답한 구석이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내렸다.
나에게 서른은 의미가 꽤 깊은 나이였다. 내가 매번 하는 말이 아마도 진정한 사춘기는 이십 대였다고. 나는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날뛰다가 여기 가서 부딪히고 저기 가서 넘어지고, 어리숙한 모습들로 잔뜩 얼룩진 어린 청춘의 시절을 보냈다. 서른이 되던 연말의 밤(만 나이가 적용되기 전이었다.), 동갑내기 지인들은 이십 대를 놓아줘야 하는 순간을 두고 예쁘게 어린 시절이 다 갔다며 아쉬운 마음에 탄식을 했지만 나는 조용히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일은 사실 별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그래도 드디어 꼬질꼬질해진 치기 어린 역사들과 이별의 안녕을 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참 묘하게도 삼십 대에 접어듦과 동시에 주변의 환경도 뒤바뀌는 시기를 보냈는데, 당시 내게 가장 중요했던 일은 아무래도 일터를 옮기는 일이었다. 적응하기 영 좋지 못했던 회사를 어렵사리 나와, 새로운 회사로 이직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니던 참이었다. 보통 회사의 임원이나 실무진으로 꾸려진 면접관들은 내가 며칠을 밤을 새 만든 포트폴리오를 훑어보다, 정적이 길어진다 싶으면 지나가는 말로 나이를 묻곤 했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아, 저, 92년생입니다. 올해 서른이 됐어요."
이미 이력서 상단에 기재됐을 정보지만, 나이를 듣고선 내 얼굴을 한번 훑어보곤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 마디씩 덧붙였다. "경력도 있으시고... 뭐, 적은 나이는 아니네요." 정신이 하나도 없던 터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작은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이후로도 다른 회사 면접에서 같은 얘기를 두세 번을 더 듣고서야, 왠지 모르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던 이 말은, 내 나이에 대한 어떤 기대치를 어렴풋이 전달했다. 그러니까 나,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구나.
새삼 억울한 일이지만, '서른'이란 나이에게 주어지는 암묵적인 미션들이 있던 것 같다. 서른이면 이 정도의 경력, 서른이면 이 정도의 경험, 서른이면 이 정도의 자산, 서른이면 이제는 어떤 관계든지 진중하게 형성해야 했다. 어린 나는 막연하게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고 단순히 나의 서툰 과거들과 헤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지만, 막상 이 나이의 무거운 무게에 흠칫 놀랐던 것이다. 나를 비로소 어른의 언저리로 보는 시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니, 갑자기 두렵고 낯선 기분이 들었다. 마치 준비됐단 듯이 서른의 나이를 초연하게 받아들이던 모습과 다르게 나는, 이미 좁아터져 여기저기 균열이 간 이십 대의 껍데기 속에 아직도 꾸역꾸역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한 단계 더 성장한다는 것은, 태어나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가득한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다. 세상 속, 내가 오도카니 앉아있던 영역의 색은 존재감을 드러내듯 더 짙어졌다. 나는 더 넓게 움직여야 했고, 능숙하게 도달해야 했고, 무겁게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
얀 오르트는 태양계를 달걀 껍데기처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천체 집단이 구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했다. 이 거대한 구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 '오르트 구름'이라 명명했다. 일반적으로 태양계의 끝이라고 알려졌던 명왕성보다 더 거대한 존재며, 아직까지 존재 여부에 대해선 관측된 바가 없어 가설의 범위에 있다. 열심히 태양계 밖을 향해 유영하고 있는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가 오르트 구름의 안쪽 구름(힐스 구름이라고도 불린다.)까지 도달하는 것을 2310년으로 추측하며, 이 오르트 구름을 관통하여 태양계 밖으로 벗어나려면 약 3만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수 윤하의 노래처럼, 살아간단 것은 주기적으로 미지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 오르트 구름을 깨는 일이었다. 이것은 아마 처음이 아닐 테고 또 매번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흐르는 시간 동안 익숙함에 절여지고 아프게 이뤄냈던 성장통을 점점 망각하고 이제는 이게 다 전부인 것 같은 내 세상도, 작아진 옷처럼 맞지 않을 때가 오곤 했으니까. 서른은 앓는다고 했나. 앓는 일은 두렵지만, 쓰러져 눕고 싶진 않았다. 나는 내 우주를 열심히 헤매다가 비로소 힐스 구름에 도달한 작고 용감한 보이저 1호가 됐다. 그리고 이제 막 구름을 깨뜨릴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