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화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비가 오지 않던 주말이었다. 한창 장마철인 탓에 매일 흐리고 비가 내려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나의 여름을 예쁜 사진으로 남기고 싶단 생각은 항상 있었지만 어쩐지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아 매년 나이만 한 살씩 먹던 중이었는데, 최근 체중을 감량한 것을 명분 삼아 몇 주 전에 스냅사진을 예약한 참이었다. 스튜디오 촬영도 재밌을 것 같았지만, 저 짙은 녹음을 담기엔 역시 야외에서 촬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위가 상상 이상으로 힘들 것 같았지만, 일단 엄청난 각오로.
나이가 어린 작가님은 내 포즈나 표정을 열심히 코치해 주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작가님의 포트폴리오는 청량한 색감과 질감이 특징이었는데, 사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몇 장 없는 사진이었지만 내 호감을 사기엔 충분했다. 마치 성능 좋은 필름카메라로 찍은 듯한 빈티지한 느낌의 사진이었다.
"이런 구도는 어떠세요?"
작가님은 촬영 중간중간 내게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작가님에 손에 들린 후지필름 사의 디지털카메라. 작가님은 똑딱이는 버튼을 누르며 작은 액정 속 사진들을 넘겼다. 인스타그램 피드 속 필름 느낌의 사진들도 일단 이걸로 찍고서 후보정을 하는 거였구나.
"...... 카메라 이런 건 많이 비싸요?"
나는 보여주는 사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질문을 했다. 작가님은 내 생뚱맞은 질문에 살짝 당황하더니 이내 대충의 가격을 알려줬다. 저렴하진 않지만, 그래도 부담은 없는 가격의 카메라.
"작가님, 저도 갖고 싶었던 카메라가 있었어요. 필름카메라인데, 라이카라고..."
"오... 엄청 비싸죠, 라이카는."
"맞아요. 그래서 제가 사진 찍는 일 못 하는 거예요."
내 우스갯소리에 둘 다 짧게 웃었다.
'라이카'란 브랜드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나는 학교 도서관을 자주 가던 학생이었는데, 우연히 책장에서 배우 배두나의 사진집을 본 것이다. 서울놀이, 도쿄놀이, 런던놀이라는 제목들의 책으로 여행 스냅사진들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배두나의 짧은 에세이도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지만.) 배두나는 사진을 참 잘 찍는 배우로 유명했다. 그녀는 특히 클래식 카메라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사람이었는데, 찍었던 필름 사진들과 함께 사용했던 카메라에 대한 얘기가 담겨 있었다. 주로 라이카와 롤라이플렉스가 자주 사용되었는데, 배두나의 '꾸밈없는 사진'이 너무 좋아서였는지. 초점이 나간 사진이나 흔들린 사진, 빛이 번져있는 사진까지. 그때부터 아직까지 라이카는 내게 꿈의 카메라로 남아있다.
'꾸밈없는 사진'. 생각해 보면 그렇다. 필름 사진은 꾸밀 수 없다. 얼마 전 엄마는 집도 좁은데 짐이 많다며, 창고에서 촌스러운 표지의 커다란 사진앨범들을 꺼냈다. 부모님의 결혼부터 친지모임, 나와 동생의 성장과정들이 필름 사진들로 인화되어 세 권의 서사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낼 즈음 집집마다 디지털카메라가 유행이었지만, 우리 집은 꽤 오랫동안 필름카메라를 사용했다. 졸업식과 입학식에 사진을 찍을 때면 친구들 부모님 손에 들린 작은 디지털카메라는 어찌나 작고 반짝거리는지, 엄마 손에 들린 까맣고 투박한 필름카메라를 보면 어린 맘에 괜히 구식인 것 같아 부끄럽고 화가 나기도 했다. 실제로 디지털카메라에 비하면 필름카메라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찍은 사진들을 바로 볼 수도 없어서 잘 찍힌 건지 알 수 없었고 잘못 찍힌 사진들을 삭제할 수도 없으니, 필름을 다 사용할 때까지 기다려서 인화를 해야만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무한정 찍을 수 있어 여러 장을 찍어놓고 잘 나온 사진만 남길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와 달리, 필름은 한 컷마다 돈이었기 때문에 늘 한두 장의 사진만을 남기곤 했다. 그래서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땐, 매번 신중해야 했다. 앵글 속에 피사체가 잘 담겼는지 몇 번을 확인한 후에, 숨을 참고 셔터를 누르기까지 긴장된 "하나, 둘, 셋"은 필수였다. 그렇게 신경을 쓴다고 써도, 필름 한 롤에 한두 장은 꼭 잘못 찍힌 사진이 나오곤 했다. 내가 조금 자랐을 때 나에게 카메라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신다며, 내 작은 손에 카메라를 손에 들려주던 날은 꼭 앵글이 삐뚤거나 흔들리게 찍은 사진들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필름 한 롤을 인화하면 항상 모든 사진들이 소중하게 앨범에 꽂혔다. 초점이 나가 흐릿한 사진도, 역광 때문에 어두운 사진도. 필름의 사진은 그런 의미였다. 사진이 찍히는 순간의 온도와 습도와 나누던 얘기까지 가장 날것으로 담는 것. 그때의 사진이야말로 '찰나' 그 자체였다.
엄청난 더위와 습도 속에서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오후에는 비 소식이 있었기 때문에 몰려오는 먹구름을 체크하며 빠르게 촬영을 이어갔다. 작가님은 몇백 장의 사진을 찍었고, 나는 다음 날 전달된 엄청난 양의 사진 중 내 맘에 드는 총 8장의 사진을 선택했다. 기본적인 피부 보정, 인물 보정, 전체적인 사진의 색감 보정까지 마친 최종본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메일로 받아볼 수 있었다.
사진 속 나는 예쁜 모습으로 한껏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 듯한 초여름의 장면이다. 내가 딱 상상 속 원하던 색감의 여름. 나와 작가님은 촬영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손부채질하며 "오늘 너무 덥지 않아요?", "비가 올 것 같아요. 우산 있으세요?"라는 대화를 나눴지만, 사진 어디에도 불쾌하게 끈적이던 습도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몰려오던 먹구름도 없었다. 수분을 잔뜩 머금은 후끈한 바람은 사진 속에선 탄산처럼 청량한 색을 띠고 있었다. 오래전 엄마가 필름카메라로 찍었던 나의 여름들은 예쁘지 않았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못생긴 선풍기 앞에서 웃는 모습, 과즙을 옷 앞섶에 잔뜩 흘리면서 수박을 먹는 모습들이 그대로 담겼다. 나의 여름은 항상 발개진 볼과 끈적해진 피부가 반들반들했다. 작가님의 사진은 맘에 쏙 들 정도로 예뻤다. 나는, 여름을 남기고 싶었는데, 하지만 나의 여름은... 사실, 그날의 여름은... 친구와 농담으로 주고받던 얘기처럼, 이제 정말 사진은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사진은 그런 것이 됐다. 여러 장의 순간 중 가장 잘 나온 순간을 또 만들고, 만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