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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는 왜 내가 잡는데?

여전사가 되다

  

“어, 어...... 어, 00 엄마~“


아래층에서 큰소리로 나를 부른다.

”어? 왜? 왜 그래? “

밤늦은 시간 책상 앞에서 수업 준비하느라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뛰어 내려갔다.

”왜? 뭔 일이야? “

”바퀴... 어휴... 큰... 큰 게. “

”뭐? 어디? 어디로 갔어? 신발 있는 데로? 이쪽으로? “

”몰라... 이... 이쪽... 인가... “

나는 사뿐히 그러나 민첩하게 옆에 놓인 아무거나(다행히도 실내용 슬리퍼 한 짝) 들고, 현관 바닥의 신발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휙, 지나가는 검은 물체.

1초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된다. 온 신경을 끌어모아, 요즘 말로 영끌.

‘오예~ 너 죽었어~‘

팍! 팍!

너무 거대한 사체다.


잠깐,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퀴벌레를 잡을 때 잡겠다는 투지에 불타 온 체중을 실어 후려치면 곧 심히 곤혹스럽게 된다.

파리를 잡아도 그렇지 않은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짧고 빠른 타격이 필요하다. 잡겠다는 욕망이 너무 지나쳐서 힘을 절제하지 못하면 사체를 터뜨려 사후 처리가 대략 난감해진다. 터뜨리지 않고 가능한 몸체 원형을 살려가며 짧은 한방의 오묘한 타격은 수년간의 경험과, 연구가 합쳐 이루어낸 곤충 사체 권리 존중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와서 꿈의 로망, 잔디가 깔려있는 마당 있는 이층 집에 입성했다.

잔디 마당이 있는 이층 집에서 사는 대가는 간단하다.

내 몸을 모기에게 제물로 내어줘야 하고, 마당 잡초에게 무릎 꿇고 기어 다니며 작은 삽으로 하나하나 파줘야 하고, 잡초 뽑은 자리에 벌레가 우글거릴 때면 ’으악!’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외면도 할 줄 알아야 하고, 가끔 보는 특이한 벌레나 도롱뇽은 일상이다.

벽에 기어가는 거미는 심하게 역겹지 않다면, 익충이라고 말하는 백과사전을 믿고, 보고 지나칠 수 있어야 한다.

화사한 햇빛을 받으며 펄럭이는 빨래를 바라보며 ‘빨래~끝~~~’ 외치며 행복했지만, 오후에 걷어온 빨래를 무릎에 올려놓고 개다가 함께 묻어 들어온 벌에 배를 쏘이는 참사도 가끔은 겪어야 한다.     

그래도, 잔디 있는 이층 집이잖아. 

그런데 이젠 바퀴벌레까지?  (얼마 전 몽골 올레길에 다녀오고 나서부터  숙소 게르에서 본 어마무시하게 큰 바퀴벌레가 출몰한다.)

  





자, 이제 사체 처리가 남았다. 어떻게 할까?

사체를 치울 때 손에 느껴지는 물컹함, 혹은 아직 붙어있는 생명의 작은 떨림, 혹은 단단하지만 남아있는 그 이상한 기운.......

그래서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

휴지를 몇 겹 싸고 그 휴지를 비닐에 넣어 벌레를 잡아 비닐을 뒤집는 거다. 그러면 벌레 사체의 촉감도 거의 못 느끼고, 휴지로만 싸서 잡을 때 생길 수 있는 참사도 (가시, 침, 액체... 윽... 상상만으로도) 비닐로 차단되어 이중으로 깔끔히 마감을 할 수 있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그나저나 나의 타격감은 세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은 아주 적절했다.

거대한 바퀴벌레가 배를 보이며 뒤집어져 팔다리를 흔들다가 조용해지고 있다.

”휴지! 비닐! 여보, 얼른! “

남편은 역시나 뭔 말인지 모르고 멀뚱멀뚱. 상황 파악이 보통 사람보다 두 단계쯤 늦은 내 남편.

회사일 외엔 모든 것에 이해력이 늦은, 늦어도 너무 늦은 남편이다.( 덕분에 나는 맥가이버가 되었지만)


누굴 시키냐, 내가 가자.

잽싸게 뛰어 휴지와 비닐봉지를 가져와 일사불란하게 사체 처리 완료.

”됐지? 나 올라간다. “ 난 승리의 여전사처럼 두 손을 탁탁 턴다.    

 

남편은 무슨 귀한 집안에서 손에 망치 한번 안 들고 자란 47대 종손 외동아들이냐고?


무슨?

장남만 귀하게 여기는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림자 같은 둘째 아들로 자라 중학 때부터 혼자 자취하고 고교 시절 입주 아르바이트하며 눈칫밥 먹고 산 사람이다.



나?

”하나 달고 나오지.” 

태아 때부터 하나 달고 나오지 못한 죄책감에 이유 없이 주눅 들어 자랐지만, 벌레를 보면 내가 먼저 나서서 잡아야만 하는 신세까지는 아니었다.


아무튼, 어쩌겠는가. 이가 못 하시겠다는데 무수리 잇몸이 해야지.

그렇게 난 파리, 모기에서부터 개미, 거미, 바퀴벌레까지 모두 때려잡는 씩씩한 여전사가 되었다. 


'당신이 잘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행복에 도움이 된다.'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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