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차 대전의 뫼즈강
두오몽 요새
프랑스군은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길게 이어진 참호와 부채꼴 모양의 철조망에 의지해 죽을 각오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군 전력은 바로 전해 11월까지 이어진 2차 샴페인 전투에 병력과 화력의 일부를 지원한 상태여서 헐거워져 있었다. 그러나 두오몽 요새의 중요성을 감안해 세 겹을 두른 참호 건설을 끝낸 후여서 방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군 사령관 패탱은 “후퇴하는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마라”는 엄명을 장교들에게 내려두었다. 마지막 남은 병사 하나가 죽을 때까지 요새를 사수하자는 결사항전 결의였다. 그는 두오몽이 지닌 전략적 가치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두오몽은 베르뎅 인근에서 가장 큰 요새였다. 지키려는 의지는 충만했지만 문제는 요새에 배치된 프랑스군 포병의 화력이었다. 대치하고 있는 독일군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졌다.
베르뎅에 주둔한 프랑스 연대의 드랑 대령은 사령부가 샴페인 전투에 병력을 보낸 것에 대해 노골적 불만을 나타냈다.
이런 적군의 분위기를 독일군 사령관이 놓칠 리 없었다. 팔켄하인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 “폐하, 프랑스군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전력을 다하겠지만 결국 피 흘리며 쓰러질 것입니다”고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팔켄하겐의 보고서는 반만 옳았다. 그들이 엄청난 프랑스 군사들을 죽인 건 맞지만 독일군 역시 많이 희생됐다.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서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전쟁은 어느덧 장기전의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의 수비는 견고했다. 독일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독일은 프랑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어야 했다.
군사학자들은 결과적으로 팔켄하겐의 우유부단함이 장기전에 한 몫을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베르뎅 전투에 앞서 팔켄하겐은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에 평화협상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팔켄하겐은 정면 돌파를 강요받았다. 독일군 사령관은 다시 한 번 전력을 기울여 프랑스군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주기로 했다. 그가 판단한 프랑스군의 급소가 바로 베르뎅이었다.
두오몽 요새를 처음 수중에 넣었을 때만 해도 그의 전략은 적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군은 확실히 독일군의 초반 포격에 겁을 먹었다. 독일의 놀라운 공업생산력은 1915년부터 일 년 여 동안 대포의 생산량을 두 배나 늘렸다.
프랑스는 일시 위기에 처했으나 독일 측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동부전선의 승리는 보잘 것 없었고, 영국의 참전으로 서부전선의 전장은 확산됐다. 독일군 정보국은 손쉬운 승리를 장담했지만 실제 전황은 그렇지 못했다.
상대의 손실만큼 아군의 희생도 늘어났다. 2월부터 6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사상자 수는 1:1.1에 불과했다. 이는 독일의 당초 예상보다 월등 밑도는 수치였다. 프랑스군을 궤멸시키기는커녕 독일이 먼저 백기를 들 지경이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솜 전투에서 밀리고 있던 독일군을 위해 4개 사단을 지원해야 했다. 독일군 사령관은 전황이 점점 꼬이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럴수록 더욱 바짝 고삐를 졸라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