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치브루란 우유가 섞이지 않은 블랙 필터 또는 드립 커피를 말한다. 스타벅스에서 판매되고 있는 오늘의 커피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수 있다. 호주에서 판매되는 다른 블랙커피의 종류로는 롱블랙, 에스프레소, 콜드브루가 대표적이다.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추출한 커피가 주류를 이루는 호주 카페이지만 배치브루는 에스프레소 베이스가 아닌 필터 커피로 만드는 종류 중 하나이다. 대용량의 원두를 갈아서 한 번에 필터 추출 방식으로 내린 후 보온병에 담아 보관한다. 그 후 주문이 들어오면 보온병에 담겨 있던 걸 부어 손님에게 제공된다.
만약 커피 애호가라면 배치브루가 제공되는 방식을 보고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커피를 미리 내려놓고 손님에게 제공하면 신선한 향미가 없어질 텐데 맛은 시간이 지나도 유지가 될까. 나는 호주 카페에서 바리스타 일하며 당연히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 아무리 보온병에 담겨 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온도도 떨어지고 신선한 향미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주 카페에서 이 커피의 판매율이 좋은 곳은 순환율도 좋은 편이다. 그래서 커피가 보온병에 담겨 보관되지만 커피가 식기도 전에 모두 판매되어 새로운 배치를 만든다. 이렇게 판매 순환율이 빠르기 때문에 신선함이나 온도가 떨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추출 후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는 배치브루를 더 이상 손님에게 팔지 않고 새로운 배치를 추출해 신선한 품질만 손님에게 제공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배치브루를 마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사람마다 차이를 보인다. 나 같은 경우는 포만감을 주는 라테류가 먹기 싫고 롱블랙보다는 부드러운 향미를 갖는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선택하는 편이다. 요즘 호주에서 이 메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배치브루 탭이 등장하였다. 생맥주 탭처럼 생긴 기계인데 각 탭마다 저장된 종류가 다르고 누르면 작은 구멍을 통해 배출된다.
2개 이상의 탭이 배치되어 있어서 자신의 취향에 따라 원두를 골라 마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카페에 가서 빠르게 커피가 제공된다는 장점을 더 극대화시킨 기계로 볼 수 있다. 직원에게 주문하기 위해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탭에서 주문과 결제를 직접 하면 된다. 그리고 커피를 받는 것까지 셀프서비스로 이루어진다.
처음 이 기계가 등장했을 때, 커피 애호가들에게 흥미로운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예전 방식대로 바리스타 직접 따라주는 걸 더 선호한다. 그 이유는 이전의 방법이 더 바리스타와의 교감도 나누고 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탭 기계와 커피를 연결해 주는 호스나 내부 청소가 잘 되고 있겠지만 언제나 아닌 곳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에서 배치브루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아메리카노와의 차이점을 궁금해할 것이다. 둘 다 겉보기엔 블랙커피로 차이점이 별로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출 시작점부터 완전히 다르다. 추출을 하는 방식과 특히 맛이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바리스타 관점으로 보면 사용되는 기계, 사용되는 원두의 로스팅 레벨, 원두를 가는 굵기까지도 다르게 결정된다.
먼저 배치브루와 아메리카노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원두의 종류가 다르다. 내가 살고 있는 호주에는 원두를 크게 필터 로스팅 원두와 에스프레소 로스팅 원두로 나눠서 판매한다. 배치브루는 필터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필터 로스팅 레벨의 원두가 사용된다. 또한 호주 카페 대부분은 싱글 오리진 원두로 배치브루를 추출한다. 싱글 오리진 원두는 특정 지역의 같은 농장에서 재배된 원두를 의미한다. 여러 가지의 종류가 섞인 것이 아닌 그 원두만이 갖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싱글 오리진의 원두 종류가 시즌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바리스타가 누구냐에 따라 선택하는 원두가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원두의 맛과 향미의 특징을 다양하게 느껴볼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바리스타로 일하며 커피에 대한 맛의 특징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카페에 가면 무조건 배치브루를 시켜 먹어 보는 것이 습관이었다. 배치브루를 먹고 맛의 특징을 찾고 원산지를 알아보는 과정이 나에게는 하나의 놀이이고 공부였다. 커피를 공부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주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다. 아직은 한국보다 스페셜티 커피의 수요와 공급율이 높기 때문에 다양한 맛과 지식에 접근성이 매우 용이한 곳이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아메리카노와 배치브루에 대한 차이점을 자세히 알아보자.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추출되기 때문에 에스프레소 로스팅 레벨의 원두를 사용한다. 필터 로스팅 레벨과 에스프레소 머신 로스팅 레벨의 차이점은 다양하지만 크게는 로스팅 시간과 과정이다. 이러한 차이점이 발생하는 이유는 소비자가 커피를 내려 먹을 때 가장 이상적인 맛을 선사하기 위해 로스터가 로스팅의 변수를 조절해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메리카노에 사용되는 원두가 배치브루에 사용되는 원두보다 다크 하게 로스팅된다.
내가 호주 카페에서 바리스타 일한 때 겪은 경험담을 공유하겠다. 나는 당시 로스터리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카페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원두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배치브루도 다양한 원두로 바리스타의 선택에 따라 매일 다르게 제공되었다. 그때 새롭게 일하게 된 바리스타가 배치브루를 만들고 같이 맛을 보았다. 나와 그 바리스타는 커피를 마시는 순간 너무 쓴 맛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다시 레시피를 조정해야겠다고 말하며 사용한 원두 정보를 함께 확인했다.
원두 정보를 확인하고 왜 쓴 맛이 강하게 느껴졌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원두의 로스팅 레벨을 확인하지 않은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에스프레소 레벨로 로스팅된 원두로 필터 커피를 내렸기 때문에 다른 맛보다 쓴 맛이 너무 강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로스팅 레벨은 어떠한 커피를 어떤 방식으로 추출하는지에 따라 강한 쓴 맛이 균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고 강한 쓴 맛만 도드라질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자.
두 번째로 배치브루와 아메리카노의 차이는 추출하는 기계에서 찾을 수 있다. 배치브루용 기계 또는 드립 커피 기계라고 불리는 기계가 사용된다. 내가 살고 있는 호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브랜드는 모카 마스터 또는 Marco 브랜드이다. 나는 호주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며 모두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 두 개의 기계 모두 장단점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사용 목적이나 카페의 성향에 따라서 골라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모카 마스터의 경우에는 뜸 들이기를 할 수 있도록 드립퍼가 설계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스타의 필요에 따라 쉽게 뜸 들이기를 진행한 후 추출을 진행할 수 있다. 물론 바쁜 카페의 경우는 모카 마스터로 뜸 들이 기하다가 추출 구멍을 열어야 하는 타이밍을 놓쳐 커피가 드립퍼 위로 흘러넘치는 경우도 많은 게 단점 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변수를 쉽게 줄 수 있다는 장점이기도 하다.
모카 마스터와는 다르게 Marco 제품은 뜸 들이기 과정을 하기가 쉽지는 않은 구조이다. 드립퍼 자체가 단순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드립퍼의 구멍을 열고 닫을 수 없다. 그래서 뜸 들이기 과정을 꼭 하고 싶다면 할 수는 있지만 경험상 추천하지는 않는다. 대신 Marco 제품의 경우 더 대용량을 추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2리터 머신을 일반 카페에서는 많이 사용하며 모카마스터보다는 최소 400ml 더 많은 양을 추출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추출된다. 호주 카페에서 사용되는 에스프레소 머신은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는 당연 라마르조꼬이다. 가장 대중적이고 흔하게 볼 수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 브랜드이다. 이러한 추출 방법 때문에 둘의 맛의 차이가 발생한다.
배치브루와 아메리카노의 맛의 차이는 분명하다. 두 커피를 비교하면서 마시다 보면 배치브루의 맛이 훨씬 마일드하고 부드러운 향미를 갖는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아메리카노도 물론 물을 희석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강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향미만 놓고 비교했을 때 아메리카노는 연하게 향미가 느껴진다면 배치브루는 풍부한 향미가 느껴진다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맛적으로 비교한다면 나는 아메리카노나 롱블랙을 시켰을 때 너무나 강한 산미나 텁텁함 때문에 마시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지만 배치브루는 그 정도로 강력한 맛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호주의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바리스타로 일한 경험이 있다. 내가 겪은 두 도시의 커피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했는데 배치브루도 마찬가지였다. 멜버른은 강력함보다 은은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지만 원두가 가진 본연의 향미도 부담스럽지 않게 남아있다. 반면에 시드니는 조금 더 강한 향미를 표현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시드니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멜버른 커피가 밋밋하고 플랫 하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고요하고 클래식한 멜버른 스타일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네 번째로 뽑히는 두 커피의 차이점은 제공되는 속도이다. 배치브루는 미리 만들어 놓고 보온병에 보관한다고 말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손님이 주문했을 때 자신의 커피를 받는 속다가 훨씬 빠르다. 컵에 미리 만들어 놓은 걸 부어서 손님에게 전달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메리카노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두를 새로 갈고 탬핑 과정을 거쳐서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추출한 후 손님에게 제공된다. 아무리 빨라도 1분은 걸리는 과정이다. 만약 다른 손님들의 커피가 밀려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호주 카페에서 배치브루를 먹고 싶다면 이른 시간에 마셔보길 추천한다. 점심시간이 지나기 전이 적당한 시간대이다. 호주 카페는 대부분 3시 전에 닫기 때문에 점심시간 이후에 배치브루가 대부분 품절되고 이후에는 새롭게 만들지 않는 카페가 많다. 또는 만들어 놓은 지 오래된 배치브루만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선한 배치브루를 맛보고 싶다면 아침 시간대를 선택하길 추천한다.
만약 배치브루가 다 나가서 마실 수 없다면 호주식 푸어오버 드립 커피를 마셔보는 것도 좋은 선택일 수 있다. 푸어오버의 경우는 카페마다 가능한 곳도 있고 아닌 카페도 있으니 카페 직원에게 먼저 확인해봐야 한다. 푸어오버를 제공하는 카페라면 다양한 원두의 옵션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원두의 종류에 따라 가격도 달라지기 때문에 꼭 가격을 확인하고 주문해야 한다. 요즘 푸어오버의 가격은 1명이 마실 양이 제공되고 약 $7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비싼 경우는 $50까지도 올라가고 그 이상 가격도 푸어오버를 전문으로 하는 카페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배치브루도 요즘에는 원두에 따라 가격의 차이를 두고 있다. 특히 고급 품종이나 옥션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여온 원두로 만든 커피의 경우는 일반 배치브루 가격의 2배 이상으로 판매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호주에서 처음 드립 커피를 마신다면 가격과 원두의 종류를 확인해 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