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영화의 세계로 데려가 준 남자들
공대를 나왔다고 말하면 내 캠퍼스 라이프, 특히 연애 생활이 즐거웠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가 많으면 잘생긴 남자가 많을 확률이 올라갈 것이라 생각하는가? 고개를 돌려 당신의 사무실을 보라. 남직원의 비율이 높건 적건 잘생긴 사람은 전무하다. 키 큰 직원도 전무하다. 머리숱이 나보다 많은 사람도 드물다. 공대도 마찬가지다. 친구 엄마네 아들들이 대부분이다. 엄친아와 헷갈리면 안된다. 친구 엄마네 아들이란 앞가림 잘하는 내 친구와 같은 핏줄인지 의심스러운, 공부는 그럭저럭 잘 하는데 그 외엔 뭐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어 못 미더운 그런 아들들을 말한다.
그래도 사람이 그냥 죽으란 법은 없다고 친구 엄마 아들 같은 남자 무더기 속에서 반짝이는 오빠가 한 명 있었다. 우리 동기 여학우들, 여선배들 모두가 좋아하는 오빠. 그는 준수한 외모에 다정한 말투를 가졌다. 여자친구랑 온돌방에 가느니 침대방에 가느니 저급하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과방에서 토론하는 선배들을 보다가, 어제 만난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하는 오빠를 보고 어떻게 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리를 자르고 가면 더 잘 어울린다는, 스윗한 말 한 마디 건넬 수 있는 센스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좋아한다고 하니 영화에 흥미가 생겼다. 영화에 대한 나의 최초의 관심이었다.
직접적으로 나를 영화의 세계로 데려간 것은 구남친이었다. 그 애를 만나는 3년 동안 CGV VIP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데이트 할 때 영화를 본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서로 마주보고 할 이야기도 많은데 왜 굳이? 그러나 사실 연인이 만나서 할 만한 것은 많지 않았고, 그렇게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점점 내가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때 만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어바웃 타임은 지금도 내 인생 영화로 손꼽는다. 마블도 그 아이 덕분에 좋아하게 되었다. 로맨스도, 따뜻한 가족 이야기도, 거대한 세계관도 각자의 매력이 있더라.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그 애는 영화관에서 조는 시간이 많아졌고, 각자 부유하는 것 같은 이 함께하는 시간에 의문이 생긴 나는 곧 혼자가 되어 취향에 맞는 영화들로 외로움의 시간을 채웠다.
제일 좋아하는 장르는 하이틴이다. 대체로 언제나 틀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제주도에서 신나게 놀고 들어와 과일향 나는 맥주 한 캔과 함께 인어가 나오는 영화를 보며 즐거워했고, 어느 심란한 날은 퇴근하고 페어런트 트랩을 틀었는데 어느새 사랑스러운 로지만 내 안에 남아있었다. 구시대적인 스텝맘 프레임 같은 것들을 걸러 보면서도 사랑스러운 장면들에 웃었던 기억이 난다. 청바지 돌려입기는 심지어 보다가 울컥했다. 그 시절 감성이 되새겨지는 것에 그 영화가 말하는 따뜻한 사랑이 너무 좋아서. 여성 혐오적 표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장르가 하이틴인데, 그래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끊을 수 없는 나의 길티 플레져.
한국에서 메이저 장르가 아니라고 하는데, 스페이스 오페라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요? 닥터후에 빠져들기 전에도 우주는 나에게 매력적인 배경이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두말할 것 없는 나의 최애 시리즈다. 크리스 파인의 스타트렉을 보고 캡틴 커크에게 빠지지 않는 방법 따위 나는 모른다. 마션도 빼먹으면 섭섭하지. 내 이북 리더기의 대기 화면은 아직도 Pretty much fucked 거든요.
이제 영화관도, 독립영화관도 집 근처에 있고 무엇보다 OTT 춘추전국시대다 보니 영화는 더더욱 쉬운 취미가 되었다. 덕분에 행복하다. 사람이 손쉬운 취미는 하나 있어야 하므로. 언제든 잠깐이나마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나의 오래된 쉬운 취미, 영화보기.
P.S.
공간을 확장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용산 아이맥스에서 듄을 보기 위해 반차를 냈던 일과 급 연차를 쓰고 떠난 부산국제영화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