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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창환 Andy Jul 12. 2022

조선 최고의 어반스케쳐는 겸재 정선이다

봄이 오는 겸재의 '수성동' 계곡을 그리다

▲ 봄이 오는 수성동 계곡을 그렸다. ⓒ 오창환



근대 이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는 누구일까? 아마 많은 역사가들이 겸재 정선(1676~1759년)을 꼽을 것 같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화성(畵聖)으로 불리는 존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문화적 정체성 확립의 과제가 주어졌는데, 이에 대한 조선 사회의 대답이 진경 문화였다. 이 시기는 숙종과 영조, 정조 시대를 거치는 약 125년간의 시기를 말한다. 500년 조선 역사에서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이 시기는 일종의 문예부흥기로 조선의 독자성을 형성하기 위한 여러 방면의 사상적, 문화적 움직임이 있었다. 문학에서는 송강 정철이 가사문학으로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열었고, 글씨에서는 한석봉이 우리 고유의 서체를 만들어 냈다.

겸재와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같은 스승 김창흡에게서 동문수학했던 시인 이병연은 진경시(眞景詩)의 대가였다. 그는 우리의 토속어와 우리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여 여행하며 직접 본 모습에 대해 시를 지었는데, 이는 이전 시대의 관념적 시 창작과는 괘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회화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향이 뚜렷하였다. 중국 화보를 모방하고 이상화된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보는 한국의 자연을 그림으로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 하고 이를 뿌리내리고 완성한 분이 겸재 정선이었다.

그가 위대한 이유는 시대적 요구에 답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관념적인 회화의 흐름을 진경산수라는 새로운 물줄기로 바꾸어 낸 인물이었다. 김홍도도 신윤복도 그런 토대 위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리고 보통 어떤 사조가 형성되어서 완성되기까지는 2, 3대 걸쳐 이루어지는데, 겸재는 40대부터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해 84세까지 40여 년간을 쉬지 않고 창작에 몰두해 진경산수화를 완성 단계까지 만들어 놓고 돌아가셨다. 

당시 당쟁이 격화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겸재는 그 흔한 귀양 한번 가지 않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의 영원한 후원자 영조대왕께서는 그를 경상도로 강원도로, 양천으로 골고루 보내셨다.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다. 그는 이에 화답하듯 겸재는 가는 곳마다 걸작을 남겼다.

그는 이미 당대에 평판이 대단해서 말년에는 그림 한 장이 한양의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그림은 당시에도 귀한 것이어서 문 창호지로 쓴다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겸제 정선은 지금도 슈퍼스타인데, 간송 미술관 등에서 '겸재 정선 특별전'이라도 할라치면 수많은 관객이 몰려든다. 겸재 이전의 옛날 사람들은 왜 진경을 그리지 않고 상상이나 이야기 속의 그림을 그렸을까? 

그때는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고, 화구를 들고 다니기도 힘들다. 진경을 그리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굳이 현장에 가서 그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는 사진이 없던 시절. 정확한 형태는 현장에 가지 않는 한 알 수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관념화된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그러면 겸재는 요즘 어반스케쳐들처럼 현장에서 그렸을까?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다. 그는 그가 살았던 곳이나 근무지, 여행지를 중심으로 그렸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대체로 가로 40cm, 세로 30cm 정도의 작은 그림이 많다. 충분히 현장에서 그릴 수 있는 사이즈다. 동양화의 화구도 작은 그림에 맞추면 비교적 휴대하기 간편하다.

내 생각에는 겸재 선생님도 우리처럼 현장에 가서 구도를 잡고 프레이밍을 하고 붓을 들어 밑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가능하면 현장에서 채색하고 시간이 없으면 집에 와서 채색하고 디테일을 그려 넣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을 것 같다.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어반스케쳐다. 물론 어반스케치와 진경산수화는 역사적 맥락이 다르고 강조하는 점도 상이하지만, 다큐멘터리 정신으로 현장에서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면에서는 일맥상통한다.
             


▲ 쉼터에서 본 수성동 전경. 왼편에 기린교가 보인다. ⓒ 오창환


 
오늘은 수성동 계곡을 그리러 간다. 수성동(水聲洞)은 계곡의 물소리가 크고 맑아 조선시대부터 동네 이름을 그리 불렀다. 겸재의 작품집 '장동팔경첩'에 <수성동>이 있다. 또한 풍류를 아는 왕자 안평대군의 정자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1971년 수성동 계곡에 9개 동 308가구의 옥인동 시범아파트가 들어선다. 당시 이 아파트는 풍광이 좋아 장안의 화제였다고 한다. 2007년 아파트가 노후한 데다 인왕산 경관을 훼손한다는 지적에 따라 철거가 결정되었고, 2008년 아파트 철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오는 '기린교'가 발견된다. 아파트를 건축할 때 바위로 된 다리에 시멘트로 덮고 철제 난간을 세워 사용했던 것을, 철거 과정에서 시멘트를 걷어내면서 겸재 그림 속 돌다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아파트를 단순 철거하는 데서 겸재의 <수성동>을 복원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다. 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에 남아 있는 바위를 보완하고, 계곡 양쪽에 전통방식의 돌 쌓기를 하는 등 그림 속처럼 암석 지형 회복에 중점을 두었다. 또 옛 경관 복원을 위해 구부러진 소나무 등 나무 1만 8천여 그루를 심었다. 공사는 2012년 마무리됐다.  

수성동 계곡은 서촌 쪽에서 가는 방법이 있고 독립문 쪽에서 가는 방법이 있다. 서촌 쪽 루트는 '서울 역사나들이'라는 모임에서 한번 가본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독립문에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어디를 갈 때에는 지도 상의 거리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독립문역에서 내려 수성동 계곡으로 가는 길은 처음부터 가파른 계단을 쉬지 않고 올라가서 인왕산을 완전히 넘어 다시 내려오는 코스다. 

수성동 계곡에는 겸재가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는 겸재의 <수성동> 그림까지 갖다 놓았다. 여기서 그리면 된다. 겸재는 부감법으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그렸다. 나에게는 기린교 옆의 바위들이 눈에 띈다. 구부러진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인왕산 정상도 그렸다. 그림에는 안 보이지만 인왕산 정상 오른편으로 치마바위가 있을 것이다.

가만히 보니 이 쉼터에 오는 사람들은 두 부류다. 말끔한 옷을 입고 있는 직장인들은 서촌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다. 손에 커피를 들고 담소를 나눈다. 그리고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하산의 즐거움에 들떠있고 떠들썩하다. 모두들 저마다 생각으로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고, 또 겸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려간다.

겸재 정선 선생님이 한양 전경을 많이 그리셨으니까, 겸재의 발길을 띠라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 곧 생각을 접었다. 겸재 그림과 비교되길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20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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