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표 보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들른 대형 마트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주차장에서 나는 넘쳐나는 차와 휙휙 지나는 행인을 피했다. 매장 안에서도 나는 고도의 운전기술을 발휘했다. 조금만 길을 잘못 들어서면 카트끼리 엉키게 되어 꼼짝달싹 못한다. 안전거리를 지키지 않으면 앞사람 발꿈치를 칠 수 있다.
요란하고 소란한 매장에서 아내는 원하는 물건을 카트에 척척 골라 담았다. 매장 내에서 우리가 장을 보는 방법은 늘 똑같다. 아내가 먼저 사람들 사이를 쏙쏙 빠져나가 물건을 고르기 시작한다. 나는 정체된 카트 차량을 비키거나 다른 길로 돌아서 한발 늦게 도착한다. 내가 매대 앞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아내는 물건의 품질과 가격 비교를 끝내고 상품을 카트에 넣는다.
아내는 과일 코너에서 포도, 귤, 망고, 수박, 바나나를 훑어보더니 사과를 한 봉지 담았다.
"좀 싸졌는가 보네"
"싸다고! 가격표 봐봐"
나는 어림잡아 일 년 동안 식탁에서 사과구경을 못한 것 같다. 아침 사과 두 쪽(반 개)은 내게 일상이었다. 아침 사과는 의사를 멀리하게 한다,는 말의 힘이 컸다. 사과를 맛보는 시간은 모든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성스럽게 다가온다.
나의 치아가 껍질을 뚫고 섬유질에 닿으면 가장 먼저 맑고 깨끗한 향이 피어나고 나의 모든 후각세포를 일제히 깨운다. '아싹'하는 소리는 또 다른 통쾌함이다. 나의 치아가 아직 건재하다는 증거다. 혀끝으로 전해오는 단맛이 뇌에 전해지면 행복감은 절정에 오른다. 사과 두 쪽은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말릴 수 없는 나의 최애 먹거리다. 먹거리였다.
어느 날부터 사과가 사라졌다. 아내의 단호한 결단에 시비를 걸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내는 '가격표 보지 않고 마음껏 과일을 바구니에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푸념 썩인 혼잣말을 했다. 사과는 서민의 과일에서 멀어졌다. 자꾸 올랐다. 가격도 오르고 재배지도 올라갔다.
나는 매장을 도는 내내 카트에 실린 사과 봉지에 눈길이 자꾸 갔다. 집에 들어가면 사과부터 한 입 쪼개야지.
집에 도착할 때쯤 되어서야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일요일이 어머니 제삿날이었다. 아내는 단출한 제사상이지만 비싼 사과를 올리는 정성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에는 시골에만 가면 트렁크에 무엇이든지 한가득 싣고 왔다. 쌀, 마늘, 양파, 대추, 배추, 고추. 월요일 출근길에 차 안에는 흙냄새가 가득했다. 내게는 어머니의 향기였다.
돌아가신 어머니 덕분에 사과를 먹는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어도 내게 뭔가를 자꾸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