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도 '역사적 개인'이다.
살아가다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몇 년 전 일이다. 박사학위 논문심사 청구를 하려면 관련 학회지에 두 개의 논문을 게재해야 한다. 기술경영 관련 학회지 게재를 의뢰하기 위해 학회에 회비를 내고 회원 가입부터 했다. 학술대회에서 구두 발표를 먼저 하고 조심스럽게 논문 게재를 의뢰했다. 두세 달 정도의 심사기간에 나는 목이 탔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두 번이나 학회로부터 거절 통보를 받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안 되는구나!
책을 출간하기 위해 컨설팅을 받는 중, 전문가로부터 자신만의 채널을 개설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나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책 내용을 요약하고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과 지혜를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고 난 다음 내게 찾아온 변화를 언급한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나의 의도가 전달될 것이라고 믿었다. 거의 4년이 다 되어가지만 구독자 수는 천 명을 달성하지 못했다. 어떤 날은 구독자가 줄어들기도 했다. 굳이 취소할 필요까지 있나? 딸은 구독자 수를 외우고 있는 나를 가엾게 보고 있다.
요즘은 퇴직 관련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하는 중이다. 2주나 4주 후에 답장을 주겠다는 회신이 오는 출판사는 사려 깊은 출판사다. 대답이 없는 출판사가 대다수다.
"아쉽게도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방향과 다소 차이가 있어 투고하신 원고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원고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며, 긍정적인 답변 못 드린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교양 있는 답변이지만 거절을 명시하고 있다. 100개사 정도 보낼 예정이다. 그래도 채택되지 않는다면 원고를 그대로 묻어 버리자.
노력해도 성과도 없고 어긋나고 뒤틀려 패배감에 빠졌을 때 생각나는 단어가 '역사적 개인'이다. 김정운 교수의 <창조적 시선>을 읽다가 메모해 둔 내용이다. BTS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같은 작품은 어느 날 혜성처럼 '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유사한 사건이 시간을 따라 축적되고 형태를 갖추면서 마침내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다고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교수는 설명한다.
BTS 이전에 '소녀시대'를 비롯하여 해외 무대를 노크한 가수들이 있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선배들의 피, 땀, 눈물이 이제야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맥락을 같이 한다. 한강 작가의 문학세계는 가까이는 아버지 한승원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인, 예술작가의 도움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역사적 개인'이라는 거창한 단어는 나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에게 성과가 없는 이유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 질 만큼 양적으로, 질적으로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때가 있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때가 오지않았지만 지나치게 욕심부려 차지한 직위, 돈, 권력은 결국 그 사람을 나락으로 보낸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호들갑 떨지 않고 시간을 쌓아가야 한다. 부지런히 자신의 시간을 경작하다 보면 일은 이루어진다. 지금이 아닐 뿐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박사학위를 3년 만에 취득했다. 체계적인 독서방법 때문이었다. 책을 읽고 요약하는 훈련을 십 년 넘게 하다 보니, 논문도 빠르고 쉽게 정리하여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았다. 두 번이나 학회지에서 거절당한 일은 3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보면 문제 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동네 형이 자전거를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안장을 잡은 척 하면서 내게 큰 소리로 말했다.
필우야, 앞바퀴를 보지 말고 고개를 들고 멀리 봐!
생각보다 나의 경작지, 즉 시간은 충분하다. '역사적 개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나의 때를 기다리자.